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수 Oct 14. 2022

병을 앓으면서 전쟁을 하고, 내정을 정비하고

(8)단독황제 시절-1: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42




1254년 2월, 바타치스는 아들과 님파이온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니케아를 단단히 포위하고 소문대로 몽골군이 니케아를 쳐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 감시했습니다. 근데 바타치스는 간질을 앓고 있었죠. 바타치스는 틈만 나면 간질을 앓았는데 어느덧 60세가 넘은 바타치스는 이틀 동안 꿈쩍도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발작하다가 들 것에 실려 나가야 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평생 자신이 통치의 롤모델로 삼아온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겪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심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54년 봄이 되자 바타치스는 거동조차 할 수 없었지요. 테오도로스는 사실상 단독 황제로서 니케아를 통치해야 했습니다.


1254년 11월 3일 화요일, 바타치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생전 많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군주였습니다. 나라의 부강함은 백성의 부유함에서 온다는 사실을 안 바타치스는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고 본인이 달걀 농사를 지어서 국고의 수입을 채웠습니다. 백성을 착취하는 세금 징수관에게는 엄하게 벌을 내렸지요. 백성을 위한 교회나 학교, 병원 건립도 많이 했죠. 콘스탄티노플 도서관에 갈 수 없는 학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세워 학문적인 지원도 많이 했고요. 달걀 농사로 지은 돈으로 아내 이리니에게 왕관을 사줄 정도로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기도 했죠. 비록 후처 안나에 대한 처우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백성들은 바타치스가 죽었을 때 그의 업적을 기억했기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테오도로스의 나이는 32세였죠. 그에게는 아버지가 차마 다하지 못했던 일, 즉 옛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는 일과 불가리아와 에피로스 원정을 마치는 일, 룸 술탄국과 휴전 조약을 맺는 일 등이 남아 있었습니다(할 일이 산더미에요).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의 이콘(출처: 위키백과)



즉위 직후 테오도로스는 룸 술탄국의 술탄을 다시 만났습니다. 몽골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 조약을 재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술탄 삼 형제 사이에서 내분이 벌여졌고, 막내 동생은 여행 도중 죽고 둘째 동생은 형하고 전투를 벌이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술탄국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술탄국이 몽골국의 완충 지대 역할을 했지만 술탄국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 소아시아 전체가 몽골국의 수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룸 술탄국과 방어 조약을 재확인한 후, 총대주교를 새로 선출했습니다. 바타치스가 죽으면서 총대주교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존경하는 스승 블렘미디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고, 교회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지지했지만, 블렘미디스는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며 제자에게 너무 오만하다고 질책했습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보다 순종적인 아르세니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습니다. 니케아에서 서품받은 아르세니오스는 테오도로스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테오도로스는 본격적인 단독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1254년-55년, 테오도로스가 즉위했을 무렵 발칸 반도의 외세가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불가리아의 새로운 차르 미하일 아센은 바타치스가 죽은 틈을 타 니케아를 침공했고, 스코페, 세레스 등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는 친하게 지내던 무잘론 형제에게 군사를 맡겼습니다. 전통적인 귀족 가문을 경멸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무작정 경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추방당한 라스카리스 형제(테오도로스의 큰아버지입니다. 바타치스의 형들이죠)에게 동정심을 표하기도 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네스톤고스 가문(3편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을 장군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잘론 형제가 승진하는 모습을 보고 귀족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스트라티고풀로스와 토르니키스는 재위 초기에 황제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면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테오도로스는 겨울에 장군들을 니케아로 소집해 불가리아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1255년 2월, 테오도로스는 승리를 기원하며 발칸반도와 소아시아의 경계 지역인 헬레스폰트로 떠났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출발하기 전에 침수된 교회를 재건하라고 명령한 뒤, 교회 건물에 딸린 학교에 기부를 했습니다. 백성을 돌보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신에게 잘해주어야 승리를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겠지요. 테오도로스는 아드리아노플에 진영을 치고 불가리아군과 격전을 벌여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습니다. 불가리아군이 황급히 진지를 떠났지만, 테오도로스는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불가리아군을 추격했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산악지대를 맞닥뜨리자 테오도로스는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테오도로스는 진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테오도로스는 아드리아노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스트라티고풀로스와 토르니키스 장군에게 봄에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명을 따라 공세를 시작했다가 양치기의 뿔소리를 듣고 적군이 매복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맥없이 퇴각한 두 사람을 보고 화가 난 테오도로스는 당장 내게 오라고 명령했지만, 장군들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간질로 판단력이 흐려진 와중 테오도로스는 귀족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심하게 불안해했습니다. 가뜩이나 싫어했던 귀족들을 더 경멸했고요. 자신의 장군들을 '적'으로 여길 정도였죠. 더구나 이미 아내 엘레나를 통해서 불가리아인이 어떤지 목격했었던 테오도로스는 '거친 산악인'인 불가리아군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여름까지 두 장군이 돌아올 생각을 안 하자 테오도로스의 분노는 점점 커졌습니다.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커졌죠.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에서 복무하던 불가리아 대공 드라고타스가 변절하면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8여년 전 니케아 제국에 망명했던 사람이었는데 다시 불가리아 차르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가버린 거죠. 요새는 포위됐고 테오도로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잘론에게 두 장군에 대한 격앙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왜 돌아오지 않냐, 그들 때문에 상황이 이리 된거라고 하면서요. 이때 테오도로스는 간질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죠.


불가리아인들이 통행을 가로막는 성벽을 지어놨기에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스의 군대는 적의 군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맥으로 올라간 뒤 두 방향에서 전진한 뒤 화살을 쏘았습니다. 불가리아군은 갑작스러운 화살 공격에 당황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드라고타스도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불가리아에 항복하지 않았던 니케아의 군인들은 테오도로스를 보고 "신속한 독수리"라고 칭송했습니다. 이렇게 테오도로스는 승기를 잡고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가 장악했던 다른 요새들도 탈환했습니다. 이때 그는 늘 적대했던 테오도로스 필레스를 석방했고, 도망쳤던 두 장군을 지휘부에서 해임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내정도 챙겼는데, 대표적으로 테살로니카의 조페국을 폐쇄하고 니케아에서만 동전을 주조하도록 만든 것이 있습니다. 소아시아에 화폐 자원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죠. 화폐 자원을 황실쪽으로 집중해서 다른 도시들이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추측됩니다. 이때 에피로스의 미하일을 강하게 지지하던 총대주교 카바실라스를 소아시아로 압송해 엄격하게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간질로 몸이 많이 쇠했지만, 테오도로스는 불가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누일 라스카리스와 콘스탄티노스 마르가리테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트라키아에 주둔시킨 뒤 이번 영광을 그들 덕이라고 한 뒤, 그들에게 새로운 관직을 부여했습니다. 마누일에게 준 관직은 프로토세바스토스(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이라는 뜻, 일종의 명예직), 콘스탄티노스에게는 군사 집무실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것으로 보아, 테오도로스가 마냥 귀족들을 멀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친구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을 편애하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촌인 알렉시오스 라울이 차지하고 있던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황제의 의상을 담당하는 관리, 군사 작전에 개입하기도 했음) 직위를 빼앗아서 무잘론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마누일이 가지고 있던 프로토세바스토스라는 호칭을 무잘론에게 부여했습니다. 원래 프로토세바스토스는 황제의 친인척에게 부여하는 호칭이었는데, 테오도로스는 신분이 낮은 친구에게 이 호칭을 주었죠. 또한 제국의 모든 부서를 총괄하는 메사존이라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 외에 무잘론의 형제와 가정교사 아크로폴리테스, 비서 하기오테오도리테스에게도 높은 관직을 부여했습니다.


반면 다른 귀족들을 홀대했는데, 대표적으로 도망쳤던 두 장군이 있었죠. 토르니케스는 불복종 혐의로 재판에 넘기고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는 수감, 알렉시오스의 형제인 콘스탄티노스 스트라티고풀로스는 실명형에 처했습니다. 알렉시오스 라울의 네 아들은 투옥시키고, 동로마의 대법관의 수장은 혀를 자르고 테오도로스 필레스는 실명시켰습니다. 이렇게 황위를 노릴 법하거나 자신과 사이가 안 좋았던 귀족들을 강력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면서, 무잘론 형제는 다른 귀족 여인들과 혼인을 시켰습니다.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의 여동생의 딸(그러니 조카이죠) 테오도라 칸타쿠제네와 결혼했고, 알렉시오스 라울의 딸은 안드로니코스 무잘론과 혼인했죠. 어찌 보면 황제의 유화 정책이라 볼 수 있겠지만, 당한 귀족들 입장에서는 황제가 '천한 측근들'을 편애하기 위해 자신들의 딸이나 여동생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1256년 늦은 봄, 테오도로스는 아버지가 못 이루고 죽은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꾀하기 위해 로마 교황과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사절들을 보내서 우리가 계속 의견이 불일치하다고, 불일치하는 점을 찾아내면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와 교황 알렉산더르 4세 간의 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이 과정에서 삼위일체(아아 제가 신학쪽을 잘 몰라서;;;;;자세히 설명을 못하겠습니다)에 대한 지식을 선보였습니다. 문제는 아르세니오스가 엄격한 금욕주의자라 교황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왔다는 점이었죠. 결국 테오도로스의 의도와 달리, 로마 교회와의 통합 문제는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1256년 봄, 테오도로스는 교황과의 협상뿐 아니라 불가리아 원정을 다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저번보다 더 많은 군대를 소집한 뒤 발칸 반도로 향했습니다. 이때 무잘론 형제가 군대의 보급과 징병을 담당했죠. 차르 미하일 아센은 헝가리를 등에 업고 니케아 제국의 영토인 트라키아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마누일 라스카리스와 콘스탄티노스 마르가리테스는 방어 진지를 유지하라는 테오도로스의 명을 어기고 그들을 공격한 쿠만족을 무작정 추격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쿠만족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죠. 결국 두 장군에 의해 쿠만족은 무자비하게 학살을 당합니다. 전쟁에 지친 미하일 아센은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를 내세워 니케아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차르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이미 내가 탈환한 영토를 노리지 말라고 하죠. 로스티슬라프는 이 말에 동의했고, 차르는 바타치스의 누이 마리아 라스카리나의 딸이자 로스티슬라프의 아내와 혼인을 했습니다. 이렇게 국경선을 정한 뒤 차르와 테오도로스는 각자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귀족들은 이 평화 조약에 반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9편에서 계속).

이전 07화 나의 소중한 친구, 나를 위협하는 경쟁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