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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Oct 17. 2022

존경하는 스승과의 갈등, 회한으로 얼룩진 마지막

(9)단독황제 시절-2: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44


브런치가 이상하네요. 그림이 업로드가 안 됩니다;;;;그래서 일단 글만 써요.



불가리아 귀족들은 미하일과 테오도로스의 평화 조약에 반발했습니다. 이 틈에, 미하일의 사촌 칼리만 아센은 사냥을 하던 미하일을 공격했고 미하일은 상처가 도져서 사망했습니다. 칼리만은 내가 차르라고 했지만, 귀족들은 미초 아센을 차르로 추대했습니다. 칼리만 역시 귀족들에게 살해를 당했죠. 미초 아센은 미하일 아센의 처남으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차르가 되었지만 니케아의 테오도로스와 전쟁을 하다가 패배하면서 (언제, 어떻게 전쟁을 치렀는지 불명확합니다. 제가 그리스어를 몰라서 영문판으로 보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를 않네요ㅠㅠ) 신망을 잃었습니다. 이때 콘스탄틴 티흐가 반란을 일으켰고 미초 아센은 동부 지역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불가리아는 동부와 서부 지역으로 갈라진 채 내전으로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1257년에 티흐는 비로소 미초를 몰아내고 불가리아의 차르가 되었죠. 테오도로스는 불가리아의 내전을 지켜보다가 티흐가 승리한 것을 알고 자신의 딸 이리니 라스카리나(어머니의 이름과 똑같네요 ㅎㅎ)와 티흐를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실제로 결혼은 테오도로스가 죽은 1258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집니다. 테오도로스가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네요ㅠㅠ).



불가리아의 차르 콘스탄틴 아센 티흐(출처: 위키백과)



1256-57년 무렵, 테오도로스는 불가리아 협상 외에 에피로스하고도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에피로스의 미하일 대신 협상에 나선 미하일의 아내는 아드리아 해의 디라키온과 마케도니아 남부의 주요 도시 두 개를 니케아 측에 넘기기로 동의했습니다.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는 테오도로스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미하일의 아들 니키포로스를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 이때 교황의 사절단도 만나 교회 통합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르세니오스의 금욕적인 성격과 '황제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교황 사절단은 니케아 측에 요구할 권한이 부족하다'라고 교황에게 불평한 것으로 보아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라틴 제국의 감옥에 수감된 포로들을 풀어달라는 협상을 교황과 진행했는데, 포로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1256년 10월, 몽골군이 룸 술탄국의 영토를 다시 침략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10월 14일, 술탄군과 몽골군이 전투를 벌였는데, 자신이 역모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망명을 떠났던(7편 참조)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술탄의 그리스군을 지휘했습니다(미하일이 자신의 동명이인인 사촌이 눈 뽑히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망명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군재가 뛰어났던 미하일은 다행히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술탄국이 니케아에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고 '지위가 역전되었다'라면서 좋아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이 기회에 술탄에게 4개의 요새를 니케아에 할양할 것을 요구한 뒤 술탄의 일시적인 망명을 허락했습니다. 영구적으로 망명을 허락하지는 않았는데, 만일 그럴 경우 몽골군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미하일도 니케아로 돌아와 다시 총사령관직에 복직했습니다(미하일이 대체 몇 명 나오는 거야;;;). 또한 술탄과도 결혼 동맹을 맺었는데, 실현되는 건 테오도로스가 죽은 1258년이었습니다.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서 영토를 넓힌 테오도로스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1257년 블렘미디스에게 자신의 업적을 요약하고 군대를 개혁할 방안에 대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지금 제국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자랑하면서 난 아직 젋다고, 조만간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면 병사들을 돌보고, 군대를 정비하고 해가 질 때까지 의무를 다하고 해가 지면 군사 작전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낸다고 말했죠. 실제로 테오도로스는 아버지가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병사를 징집했고 추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을 비롯한 재정 담당자들은 자금을 확보할 곳이 없는지 호시탐탐 탐색했습니다. 블렘미디스는 군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징발하거나 강제로 판매하게 하고, 그의 수도원에서 해상세를 지불하게 한 제자의 행위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아무래도 수도사가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걸 중세인들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웠겠죠). 


테오도로스는 그리스인이 아니면 우리를 도울 수 없다, 불가리아인이나 세르비아인, 페르시아인(아마 룸 술탄국에 사는 유목민족이었을 거예요. 동로마 사람들은 종종 이슬람인을 페르시아인이라고 불렀으니까요) 같은 외세를 어떻게 믿냐고 하면서 스승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군대에 자금을 대려면 공적인 세금에 의존하기보다 사재기로 동전과 귀금속을 잔뜩 모아야 한다면서 신경질적으로 대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후대의 군인들이 판단해줄 것이라면서 편지를 마무리지었는데, 제 생각에 세금이 걷히지 않으면 국가 재정이 빚더미에 오를 테니 걱정되었을 수도 있고 본인이 진짜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간질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테오도로스는 편지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테오도로스의 군사적 업적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테오도로스가 룸 술탄국에게 탈환받은 4개의 요새를 투르크메니스탄이 정복했고(다만 테오도로스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워낙 일찍 죽어서...ㅠㅠ), 발칸 반도에서 테오도로스의 큰아버지 미하일 라스카리스는 테오도로스 몰래 테살로니카에서 에피로스와 관계를 맺고 있던 영주들의 공물 납부 같은 의무를 면제해주었고, 콘스탄티노스 토르니케스 매형 페트랄리파스는 예전에 바타치스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테오도로스가 황제가 되자 에피로스의 미하일에게 다시 의탁했습니다. 황제는 마케도니아 국경 지역에 대한 지휘권을 비천한 출신의 사람들에게 맡겼는데, 아마 주위 친인척들이 자신에게 계속 실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테오도로스는 에피로스의 미하일에게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친척들의 문제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황제라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했는데 테오도로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에피로스와의 결혼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에피로스의 미하일에게 두라초와 세르비아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화가 난 에피로스의 미하일은 당장 협정을 파기하고 테살로니카를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출격시켰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믿지 못해서 소규모 군대만 보내주었습니다. 팔레올로고스는 그래도 두라초까지 진출했으나, 에피로스의 미하일은 아카이아의 왕자와 시칠리아의 왕을 끌어들였고, 포위 공격을 계속 했습니다. 미하일이 프릴레프로 진군하려 하자, 테오도로스는 팔레올로고스에게 더 이상 진군하지 말고 회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이러한 위기를 적극적으로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1257년 11월, 그동안 앓고 있던 간질이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접 원정군을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스승 블렘미디스에게 어깨부터 팔이 저리고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죠. 그러면서 다른 의사들은 멍청해서 치료를 못한다고, 스승님이 치료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습니다. 몇 달 전에 스승에게 보였던 낙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죠. 그리고 자신이 병에 걸린 원인이 불가리아 원정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58년이 되면서 테오도로스의 체중이 감소하고 계속 발작을 했습니다. 우울하게 지내는 경우도 많아지고, 성격도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죠. 이러한 좌절 속에서 테오도로스는 점점 마술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자신이 병에 걸린 이유가 마술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에 적이 많고 의사들도 믿지 못하니 마술 탓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그는 '마술을 부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습니다. 피고인들은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시련을 겪어야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걸려든 사람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의 맏누이 마리아 마르타였습니다. 그녀의 사위 카발라리오스가 자신이 마르타의 딸과 결혼한 이유는 마법 때문이라고 하면서, 마치 장모가 마법을 부리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마리아 마르타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벌거벗은 채 쥐와 고양이들이 가득한 자루에 갇혀야 했죠. 자루 밖에서는 고양이들을 계속 찔러댔고, 자극받은 고양이들은 마르타를 할퀴었습니다. 그리고 테오도로스는 마르타의 동생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미하일이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의혹 때문이었습니다(아마 마르타에게 고문을 가한 이유는 미하일을 불러일으키려고 인질 삼은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미하일은 프릴레프로 진군하던 중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변덕스러워진 황제는 머지 않아 미하일을 용서하고 풀어주었는데, 테오도로스가 병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탓도 있지만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미하일을 겁주기 위해 일부러 체포-투옥, 석방-용서를 반복했을 수도 있고, 미하일이 훗날 복수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건 나중에 실제로...) 같기도 같습니다.


테오도로스는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단독 황제가 됐을 때, 사람들은 '성군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젊은 황제가 개화된 정치를 할 것이라고, 제국이 부흥할 것이라고' 많은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수복은 커녕 불가리아 원정을 치르느라 많은 세금을 소모하고 병사들을 희생시켰고, 그가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에피로스와의 협상은 무산되고, 귀족들(특히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과의 갈등은 봉합되지 못한 채 역모를 꾸밀 것이라는 의심에 시달렸죠. 간질로 인한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요. 그의 병적인 의심 탓에 많은 귀족들이 무자비하게 숙청당했습니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왜 살려뒀지) 외에 황실 근위대원, 오랫동안 황제를 모신 궁정 관리 등이 불경죄로 기소되었습니다. 후자의 경우 부하가 황제의 통치가 종말에 임박했다고 예언했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블렘미디스가 개입한 후에야 간신히 사면을 받았습니다. 블렘미디스는 에피로스 주에 내린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무고한 기독교인들을 마구잡이로 처벌하는 행위를 자제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황제이자 제자였던 테오도로스와 거리를 두었지만, 테오도로스는 여전히 스승을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1258년 초, 비록 자신의 통치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테오도로스는 조만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8살짜리 어린 외아들 요안니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뒤,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을 섭정으로 임명했습니다. 신하들은 왕위 계승에 협조할 것을 요구받았고, 테오도로스는 요안니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잘론에게 통치 권한을 일임했습니다. 그리고 5년 전 아내 엘레나가 죽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5년 전에 그는 죽은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글을 썼었습니다.


약은 소용없고, 세월이 흐르면 병은 점점 악화되고, 배는 난파되고, 돛은 부주의로 산산조각나고, 키는 배 밖으로 던져지고, 바람은 반대로 가고, 해는 지고, 밤이 된다. 폭풍은 거세지고, 짐은 무겁고, 길은 멀고, 시간은 짧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분명하며, 모든 것이 끔찍하고, 위험은 가까이 있으며, 사망은 불가피하다.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1253년 아내 엘레나가 죽을 때 지은 글


그는 글을 쓸 때 죽음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느꼈었죠. 첫 번째는 아내가 죽을 때, 두 번째는 자신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였습니다.


테오도로스는 하느님에게 영혼을 바칠 준비를 했습니다. 총대주교가 마지막으로 연설을 했는데, 테오도로스는 그의 발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8월 16일 금요일,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마그네시아의 황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36살로, 아버지가 62세까지 살았던 것에 비하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테오도로스의 시신은 소산드라 수도원에 묻혔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어릴 적 고귀한 지위로 태어나 성군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나, 자신의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이제 그의 무거운 짐은 아들 요안니스와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 맡게 됩니다(10편에서 계속).


*10월 19일 수요일 마지막 편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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