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황제가 되고 싶었던 그의 회한

(10)에필로그: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by 히스토리퀸

지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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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년 8월 16일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가 죽은 후, 테오도로스가 세운 정권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사실 백성들은 게오르기오스를 비롯한 무잘론 형제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로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겠지만, 본인의 성격상 쉽게 인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다가 억지로 어린 아들 요안니스와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에게 충성을 바치게 했습니다. 사실 테오도로스의 건강 상태만큼이나 정권도 위태로웠죠. 귀족들은 집요하게 무잘론을 미워했고, 무잘론이 왕위를 탐낸다고 의심하기도 했죠. 무잘론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지, 테오도로스의 추도식을 명목으로 섭정단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머물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테오도로스가 죽은 지 9일 뒤, 피비린내나는 복수가 펼쳐졌습니다. 테오도로스 2세의 추도식 날, 어린 황제와 무잘론 형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참석했습니다. 찬송가가 연주되는 동안, 밖에 있던 라틴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요안니스가 그만하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자, 이들은 황제가 자신들의 뜻에 찬성한다고 오인했죠. 용병들은 무잘론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들의 몸을 난도질했습니다. 용병들의 잔인한 행동에 군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죠. 죽은 테오도로스에게 왜 우리를 이런 곳에 오게 하냐고 꾸짖을 뿐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용병대 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도 마찬가지였고요.


미하일이 왜 용병들의 쿠데타를 말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의 아내가 미하일의 조카였기에, 자신의 조카가 피해입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고, 쿠데타의 배후가 미하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설이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산드라 쿠데타 이후 미하일이 바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니케아는 적국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에피로스의 미하일, 시칠리아의 만프레드, 아카이아의 왕자 빌라르두앵 등이 모두 동맹을 맺고 니케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사람들은 사방이 적국으로 가득한 이유가 선황인 테오도로스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에게 기대감과 동정심을 동시에 드러냈죠. 군재가 탁월했던 미하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미하일의 본심을 모르는 요안니스도 미하일을 좋아했죠. 그리고 1258년 11월, 미하일과 요안니스는 니케아의 공동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미하일과 아내 테오도라는 보석이 달린 왕관을 쓰고 요안니스는 진주 몇 개가 달린 작은 왕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맹세에는 책략이 숨어 있었죠.


사실 미하일이 보석 왕관을 쓰고 요안니스가 진주 몇 개가 달린 왕관을 쓴 건 어린 요안니스를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는 선배 황제인 요안니스가 먼저 왕관을 써야 한다고 했으나 다른 주교들은 미하일이 먼저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미하일이 먼저 왕관을 썼습니다. 결국 회의감을 느낀 아르세니오스는 사임하고 수도원에서 은거했습니다. 그래도 미하일은 수많은 돈과 토지를 귀족과 백성들에게 뿌리며 신망을 얻었습니다. 미하일은 아르세니오스 후임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니키포로스를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1259년 초, 자신의 동생 요안니스를 존경받는 통치자(세바스토크라토르)로 임명하고, 예전에 도망쳐서 테오도로스에게 굴욕을 당했던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는 육군사령관(메가스 도메니코스)이자 부제(카이사르)로 임명했습니다. 그 외 콘스탄티노스 토르니케스 같이 테오도로스에게 박해당했던 다른 귀족들도 관직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실명당한 테오도로스 필레스의 아들과 미하일의 조카를 결혼시켜서 필레스 가문과 동맹을 강화하기도 했죠.


대망의 1261년, 미하일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미하일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1259년 동생 요안니스가 마케도니아에서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에피로스의 미하일 군대를 대패시켰고, 1260년 초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제노바인에게 특권을 부여해 군사적 지원도 얻었지만, 전함이 없었기에 황금뿔을 가로막는 거대한 쇠사슬을 뚫고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미하일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앞에 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 사건은 콘스탄티노플의 보두앵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줍니다. 그리고 1261년 7월 25일 밤, 소수의 무장 병력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돌파했습니다. 스트라티고풀로스는 현지 백성들에게 라틴인 군대가 니케아의 다프노시아 섬을 공격하러 가서 콘스탄티노플 뒷문에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죠. 그리고 스트라티고풀로스의 군대가 성문을 열고 수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로요, 자고 있던 보두앵은 도망을 쳤다가 평생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콘스탄틴노플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하일은 8월 15일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내, 아들과 함께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미하일이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한 동안, 라스카리스 가문의 사람들은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먼저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에서 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4달 뒤 크리스마스, 미하일은 요안니스를 체포한 뒤 눈을 뽑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요안니스 4세의 생일이었죠. 11살이었던 요안니스는 자신의 생일날, 아버지의 정적에 의해 실명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안니스는 평생 감옥에 갇힌 채 살다가 미하일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한창 통치하던 1305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무려 40년 넘게 눈 뽑힌 채 감옥에서ㅠㅠㅠ). 요안니스의 자리는 미하일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차지했고, 미하일이 1282년에 죽자 단독 황제가 되었죠. 테오도로스의 큰아버지였던 마누일 라스카리스도 투옥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라스카리스 왕조의 니케아 정권을 지방 정권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다만, 테오도로스의 또 다른 큰아버지인 미하일 라스카리스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충성을 바쳤고, 헝가리의 대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헝가리 왕의 딸 안나와 안드로니코스를 결혼시켰는데 공교롭게 안나의 외조부가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였습니다(테오도로스 2세의 외할아버지였으니 안나와 테오도로스는 6촌 관계였네요).


151_-_John_IV_Laskaris_(Mutinensis_-_color).png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출처: 위키백과)



미하일이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두 눈을 뽑고 라스카리스 왕조가 지방 정권으로 격하됐다는 소식이 퍼지자 니케아 사람들은 들고 일어났습니다.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의 영웅인 테오도로스 2세의 외증손이자, 자비로운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의 적손이었기 때문에 지지 기반이 탄탄했습니다. 테오도로스의 딸이자 요안니스의 누나인 이리니 라스카리나와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티흐도 격분했지요.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는 요안니스를 실명시킨 미하일에게 분노하여 파문을 선고했습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달라고 청하자 아르세니오스는 미하일에게 참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미하일은 아르세니오스가 라스카리스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고 믿고 아르세니오스를 총대주교직에서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총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이미 민심은 악화됐지요. 니케아의 근원이었던 소아시아에서 요안니스의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요안니스 4세를 참칭하는 사람까지 나타났습니다. 결국 미하일은 소아시아 대신 콘스탄티노플의 재건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훗날 소아시아가 튀르크족에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빠르게 몰락하여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테오도로스의 라스카리스 왕조가 빠르게 몰락한 이유는 절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테오도로스의 교회 통합이 무산되고 귀족 집단과 반목을 일으키면서 벌어진 필연이었지요. 블렘미디스와 아크로폴리테스 같은 테오도로스의 지지자들도 미하일이 황위에 오르자 미하일에게 뚜렷하게 반대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블렘미디스는 젊은 황제와 열띤 대립을 했던 시절을 강조하며 수도 생활에 집중했습니다. 아크로폴리테스는 고위 제국 관리이자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황제를 충실히 섬겼고, 테오도로스가 화를 잘 내고 통치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이렇게 테오도로스 2세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거나 기억하는 사람들 마저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테오도로스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니케아 출신 역사학자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는 미하일,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를 비판하면서 테오도로스를 학문의 후원자이자 철학자, 재능 있는 군주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주위 친인척들보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품과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한 것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가 얼마나 유능한 학자였는지 자료가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의 학식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그의 존재감은 성군이었던 아버지와 외조부, 억울하게 눈이 뽑혀 유폐된 아들에게 묻히게 되었지요. 테오도로스가 아버지와 외조부에 비해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귀족 집단간의 갈등과 간질이라는 질병 때문에 그의 업적에 얼룩이 묻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테오도로스가 오래 살지 못한 탓도 큽니다. 테오도로스는 단독 황제가 된지 2여년 만에 존경했던 아버지 곁으로 떠났지요. 콘스탄티노플 수복도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바라던 개혁에도 실패하고 본인의 학식을 통치에 활용하는 데도, 후대에 남기는 데도 실패했지만, 오히려 실패했기에 발 밑에서 흐느끼는 테오도로스의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황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보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집니다.


Theodore_II_Laskaris.jpg


참고 사이트

한글판, 영문판 위키백과, 나무위키

참고 문헌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06,07.

Dimiter Angelov, 《The Byzantine Hellene: The Life of Emperor Theodore Laskaris and Byzantium in the Thir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August 1, 2019)

Jonathan Harris, 《The Lost World of Byzantium》, Yale University Press (August 15, 2015)




지금까지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의 일대기를 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왕실 연애사를 연재한 뒤, 내년 상반기에 동로마의 콤니노스 왕가의 황제 일대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성군도 폭군도 있었던 콤니노스 황가의 일대기. 과연 누구를 연재하게 될까요?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그 전에 왕실 연애사를 연재한 뒤 1월 중에 전자책 펀딩을 열 예정이니...연애사 먼저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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