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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a Ka Oct 11. 2022

나의 소중한 친구, 나를 위협하는 경쟁자

(7)공동 황제 시절-3: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지난 편

성군의 조건, 아버지의 달걀 왕관




테오도로스는 아버지에게 성군의 자질과 동시에 간질을 물려받았습니다. 심한 간질 때문에 그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그로 인해 늘 암살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래서 그는 주위 귀족들을 의심하고, 수행인이나 비서 등 낮은 신분의 친구들을 가까이 했습니다. 친구들은 테오도로스에게 학문적인 교류를 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지만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의 경우 황제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죠. 테오도로스의 친구들은 모두 교육을 받았고, 교육에 대한 열정도 강했지요. 이들은 모두 궁정에서 후원을 받았고 황실에서 근무하는 젊은이들로, 모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테오도로스는 1254년 《봄과 매력적인 남자에 관한 찬사》라는 작품에서 자신이 종종 슬픔과 걱정에 압도당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공적인 업무 탓도 있지만 간질이란 병 때문에 고통을 받았기에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얻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수행인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친구는 무잘론 형제였습니다. 무잘론 형제에는 테오도로스(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와 동명이인), 게오르기오스, 안드로니코스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도, 왜 황제를 섬기게 됐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삼형제의 신분이 낮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중 둘째인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은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무잘론은 이미 1240년대 초부터 테오도로스의 대리인이자 측근으로 활동했습니다. 두 사람은 "주인과 하인" 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무잘론에게 편지를 보낼 때 "가장 달콤한 무잘론", "내 영혼의 위로", "내 최고의 기쁨", "내 최고의 천상의 아이" 등 온갖 달콤한 언어를 써서 무잘론과의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전직 견습기사이자 음악가, 궁정 광대였던 무잘론이 고위직에 오른 것은 다른 귀족들에게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귀족들이 무잘론이 천박하다고 비난하자, 테오도로스는 귀족은 혈통이 아니라 인품의 고귀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했죠.


이처럼 테오도로스가 어울렸던 친구들은 주로 비서나 수행원같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친구 콘스탄티노스는 하인이자 편지를 전달하는 전령이었습니다. 카리아니테스도 전령이자 중개인이었죠. 시몬이라는 친구는 무잘론과 함께 블렘미디스를 돕던 친구였습니다. 특히 테오도로스와 함께 블렘미디스의 제자로 있었고 훗날 테오도로스의 가정교사가 된 아크로폴리테스하고도 친하게 지냈죠. 또한 테오도로스는 자신의 고향인 소아시아 태생의 친구들을 좋아했습니다. 무잘론 형제가 대표적이었죠.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모두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크로폴리테스는 이미 라틴인에게 함락당한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습니다. 테오도로스는 공무가 끝난 뒤 여가 시간에 음악과 문학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무잘론이 궁정 광대였던 건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친구들은 테오도로스가 지은 시나 소설의 독자이자 평론가가 되기도 했죠. 이때 자신이 싫어하던 가정교사와 에페소스의 주교 니키포로스를 풍자 아닌 풍자로 조롱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무잘론이 병에 걸리자 그에게 웃음거리를 주기 위해 주교를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테오도로스의 생각에 그 주교는 아버지 바타치스에게 인정받지 못한 탐욕스러운 주교였거든요.


1250년대, 테오도로스는 아크로폴리테스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철학 외에 논리학과 수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갖게 됐고, 본인이 남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테오도로스가 가르친 상대는 바로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었지요. 그는 무잘론에게 실용과 이론 철학을 가르치면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스는 황제로서 정치적 위험에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철학 사랑과 궁정 문학(주교를 조롱하며 남의 병을 달래주는 것 등)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로스는 이렇게 "조롱당하는 것을 즐긴다"라고 날서게 반응했습니다만, 마음속으로 점차 사람들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주교를 풍자한 그의 편지를 보고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미덕이란 태생이 아니라 고귀한 인품에서 오는 것이라고, 그 주교는 탐욕스러운 자라고 했지만 귀족들과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테오도로스가 학자였다면 학계에서의 갈등으로 끝났겠지만, 그는 공동황제이자 미래에 단독황제가 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황제로서 두 명의 귀족과 특히 충돌했습니다. 두 사람 역시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처럼 콤니노스 가문의 분파 출신으로,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와 테오도로스 필레스였습니다. 미하일과 필레스는 사촌 지간으로, 증조부가 알렉시오스 3세였으니 알렉시오스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1세의 외손자인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의 먼 친척인 셈이었죠. 테오도로스는 두 사람, 특히 필레스를 먼저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의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와 필레스는 서로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누가 먼저 논쟁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53년 필레스는 테오도로스가 바람을 피웠다고 질책했고 테오도로스는 화가 나서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것이 최초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트레비데스를 살해한 혐의로 필레스를 기소했습니다. 그리고 스승 블렘미디스에게 가서 나는 결백하다고,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내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울고 불며 빌었습니다. 블렘미디스가 최근에 바타치스와 마르치나와의 관계를 비판했다가 철회했던 것을 테오도로스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렘미디스는 결국 제자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이때 테오도로스는 그로테스크한 초상화를 그리면서 필레스라고 가리킬 정도로 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아크로폴리테스를 시켜 아버지에게 당장 필레스를 처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요. 바타치스는 필레스를 처벌하지 않고 필레스와 같이 있던 테살로니카 총독만 징계했습니다. 테오도로스와 필레스는 끝없이 서로를 경계했지요. 뿐만 아니라 테오도로스는 필레스의 친척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보고도 긴장했습니다. 그는 미하일이 아버지 바타치스의 총애를 받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미하일은 테오도로스의 궁정에서 함께 자랐고 나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하일이 엘레나의 여동생이랑 결혼하려 했는데, 미하일과 테오도로스가 친척 지간이었기에 이는 근친이었지요. 근친은 기독교에서 엄하게 금했기에 테오도로스는 미하일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1254년, 바타치스가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에 맞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의 젊은 부하들 중 한 명이 불가리아의 차르이자 에피로스의 통치자와 비밀 협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총독이 하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였고 미하일 역시 콤니노스 가문 출신이었기에 바타치스는 미하일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미하일은 용맹한 군인이었고 30살에 이미 제국군 총사령관을 맡을 정도였지요. 결국 미하일은 역모죄로 몰려 쇠사슬에 묶여 룸 술탄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총대주교가 미하일의 무죄를 입증하고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미하일은 다시 총사령관에 복직했습니다 .그리고 바타치스는 자신의 동생의 손녀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미하일을 결혼시켜서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하지만 미하일과 테오도로스 간의 악감정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1254년 11월,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가 세상을 떠나고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가 단독 황제로 재위하기 전까지 테오도로스는 우정에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유대감은 혈통이 아니라 경제, 사회, 이념의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외조부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들이 바타치스를 공격한 사건 처럼 오히려 귀족사회 내의 가족들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요. 아마 스스로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안 테오도로스는 자신이 죽으면 친척인 미하일이 어떻게 행동할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그리고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읍읍). 무잘론의 인품이 고결한 것도 있지만, 철학 등 학문과 예술 활동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것, 신분이 낮아서 테오도로스가 아니면 든든한 인맥이 없기에 테오도로스에게만 충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무잘론을 총애했을 것입니다. 훗날 아들 요안니스 4세의 섭정단에 미하일이 아닌 무잘론 형제를 임명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테오도로스의 유대관계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해야 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유토피아적인 이상향된 유대 관계를 꿈꿨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지요. 귀족들은 차기 단독 황제가 될 인물이 천박한 인물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나라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귀족들을 어떻게 견제할지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물려준 간질 때문에 그의 판단력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엘리트 귀족을 중심으로 좀 더 현실적인 정치를 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고결한 친구들을 바탕으로 한 인맥 정치를 했을까요? 테오도로스가 단독 황제가 된 후 어떻게 행동했을지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8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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