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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Apr 25. 2021

교수님이 『소포클레스 비극』을 읽으라고 하셨다

이덕무와 소포클레스의 공통점

이덕무의 편지글에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이미 인터넷에서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을 예로 들어보자. 인터넷 사전의 경우 검색하면 3초도 안 되어서 나온다. 반면 종이 사전은 원하는 단어를 찾으려면 5분은 넘게 걸린다. 인터넷에서 정보 찾는 게 더 쉽다는 뜻이다. 심심할 때는 누워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은 읽히고, 베스트셀러도 존재한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번역도 엄밀히 말하면 글쓰기 작업이다). 그런데 글 쓰는 것과 책 읽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의 가치를 모르던 시절이.   



대학생 때 작가가 되기 위해 문예 창작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소설 한 편을 쓰라고 하셨다. 나는 가정부와 병약한 부잣집 도련님과의 로맨스를 주제로 썼다. 지금 보면 흔한 스토리지만 그때는 잘 썼다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쓴 소설이 어땠는지 평가하셨다. 너무 흔하다, 상투적이다, 주제 전달이 안 된다. 재미가 없다…. 혹평이 막 날아왔다. 내 차례가 되었다. 교수님은 내 소설에 호평도 혹평도 하지 않으셨다. “소포클레스 비극을 읽어보아라.”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저자 소포클레스는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이자 비극의 완성자였다. 현존하는 비극은 7편으로,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과 「엘렉트라」이다. 전자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아버지에게 버려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신탁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이디푸스는 유랑 생활하게 된다. 후자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엘렉트라의 이야기로, 동생과 함께 어머니와 어머니의 애인을 살해하면서 복수에 성공한다.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교수님은 왜 『소포클레스 비극』을 읽으라고 하셨을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복습하라고? 내 소설하고 상관없어 보였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배경은 고대 그리스이고 내 소설은 현대였기 때문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을 자신도 없었다. 호평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6년이 흘렀다. 내가 쓰던 소설이 제대로 쓰이지 않던 때,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에게만 특별히 소포클레스 비극을 추천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펼쳤다. 책을 읽다가 아래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오이디푸스: 제가 낳은 자식에게 어찌 감히 그럴 수가?     
목자: 사악한 신탁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어떤 신탁이었지?     
목자: 그 아이가 부모를 죽일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어째서 그대는 그 아이를, 이 노인에게 주었는가?     
목자: 그 아이가 가여워서였습니다, 주인님. 저는 그가 그 아이를 자기 나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그 아이를 구해 가장 큰 불행을 가져왔나이다. 만일 그대가 이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알아두소서. 그대는 불운하게 태어났사옵니다.     
오이디푸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규한다.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면 머나먼 세계의 사람들 이야기 같지만, 위 대사를 곱씹으면 오이디푸스가 절규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종이 속 인형들이 머릿속에서 숨이 붙고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이때 내 소설 결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남자를 정성스레 간호하지만 결국 남자는 죽고 만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안하무인이었던 남자가 여자를 통해 사람 간의 정을 깨닫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메시지에 치우쳐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말을 전달하는 인형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수님은 호평하지 않으셨지만 내게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스스로 자기 작품의 문제를 찾기 바라셨기에 『소포클레스 비극』을 읽어보라고 하신 게 아니었을까.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에 쌓여 있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으므로 이름하여 가사어(袈裟魚)라고 한다. 대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화한 것인데, 잡기가 매우 어렵다. 삶아서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덕무, 『이목구심서』 중에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는 가사어라는 물고기가 나온다. 하도 소나무만 쳐다보다가 제 몸의 무늬도 소나무를 닮아버렸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이 물고기에게도 삶아서 먹으면 무병장수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책도 가사어와 비슷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 책 속 인물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삶을 내 삶으로 체화할 기회를 준다. 감정 표현도 풍부해지고 생각도 많아지니, 남을 이해하는 능력도 생긴다. 세상은 남과 더불어 사는 곳이 아닌가. 남의 삶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이켜보자.          



<참고도서>

정민, 『미쳐야 미친다』, 2004, 푸른역사.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2008, 숲.     




4월부터 <출판번역 맛보기>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1주 차에 번역을 한 뒤 2주 차에 한글 에세이를 작성했습니다. 더 많은 작가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어 브런치에도 에세이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왜 『소포클레스 비극』을 읽으라고 하셨을까요. 이덕무가 왜 가사어의 존재를 글로 남겨 두었을까요. 소포클레스가 왜 비극을 썼을까요. 남을 이해하는 능력은 작가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연결됩니다. 작가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왜 이 구절을 썼을지 그 의도를 파악하면 쉽게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문장만 옮기는 게 아니라 문장, 아니 글 전체에 담긴 뜻을 제대로 옮기기를 기원하면서 <번역의 세계에 발을 디디다> 첫 번째 글을 마칩니다. 다음 주에는 새로 기획한 책의 내용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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