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리나입니다. 소포클레스 비극을 갖고 글 쓸 때 새로 기획한 작품을 보여드리겠다고 했었죠. 사실 기획서는 저번 주에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게을러져서 자꾸 미루었어요. 요즈음 집에서 지내다 보니 나태해졌어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게 되는데, 이게 백수의 단점이죠. 부모님한테 얹혀사는 주제에 핑계는 주저리주저리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번역은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4월부터 번역 스터디를 하면서요. 이제 조원들 간의 피드백을 끝내고 번역가 선생님께 첨삭을 받았죠. 부족한 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괜찮았는데, 독자가 보기엔 어색한 부분이나 번역으로 인해 뉘앙스가 바뀐 부분을 지목받았어요(이 부분은 스터디 끝난 뒤 후기 작성할 때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아직 공부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따라잡아야 할 것도 많았죠. 독자들에게 제 번역을 보여드릴 단계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도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올리겠습니다(사실 글을 쓰면서 제가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거든요. 번역 문제라든가 번역 문제라든가 번역 문제라든가...).
앤 네빌의 생애를 전면으로 다루다
이번에 기획한 책은 에이미 라이선스의 《Anne Neville: Richard III's Tragic Queen》입니다. 영국의 역사 인물 앤 네빌의 생애를 파헤친 책이죠. 앤 네빌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조연으로 나왔던 왕비입니다. 장미전쟁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도 왕비로 등장하죠. 《리처드 3세》의 앤 네빌은 남편과 아버지의 살인한 리처드를 저주하다가, 리처드의 애정 어린 공세에 굴복합니다. 하지만 이는 리처드의 속임수였고 앤은 리처드에게 이용만 당하고 살해당해요. 《왕좌의 게임》에서도 사이코패스 남편에게 학대만 당하는데 보고 있으면 불쌍하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와 오빠가 죽으면서 현실을 깨닫지만요(이 모습은 실제 앤 네빌 하고 비슷해 보이네요. 앤한테는 오빠가 없지만요). 실존 인물 앤은 어떨까요? 정말 수동적이고 무지한 인물이었을까요? 정말 적에게 몸을 바쳤을까요? 《Anne neville: Richard III's Tragic Queen》은 신화나 문학이 그리지 못한 진짜 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영국의 왕비 앤 네빌(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영국사의 뿌리를 바꾼 내전, 장미 전쟁
그런데 왜 앤 네빌일까요? 15세기 영국 왕비가 우리하고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앤은 장미전쟁이 시작할 때 태어나 장미전쟁이 끝나기 몇 개월 전에 죽습니다. 장미전쟁은 두 가문이 왕위를 놓고 대립했던 내전으로서 영국 절대 왕권이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했죠. 영국사에서 흔치 않은 내전(장미전쟁 말고 더 있기는 하요. 다른 전쟁은 <역사가 버린 2인자>, <왕을 지킨 여자들> 매거진에서 다루도록 할게요)이다 보니 영국 학계에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왕좌의 게임》 등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드라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어요. 장미전쟁 시대 여성들을 다룬 《화이트퀸》이 BBC에서 방영했고요. 장미 전쟁의 자세한 전개 과정은 <전쟁의 폭풍 속에서 살다 간 여인>, <킹메이커의 시초를 재조명하다> 글에서 보실 수 있으니, 결말 부분만 말씀드릴게요. 랭커스터가와 요크가가 치열하게 다투다가 헨리 튜더가 승리했죠. 헨리 튜더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3세의 후손, 아버지는 헨리 6세의 이복형제이니 랭커스터가문의 일원입니다. 하지만 리처드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혼인하면서 화합을 추진했어요. 랭커스터가, 요크가에서 항복하는 신하들을 포용했죠(그래도 대놓고 반역하는 사람은 가만 안 둡니다. 로벨 경과 램버트 심널, 퍼킨 워벡이 반역하다가 로벨과 워벡은 처형당했어요. 심널은 나이가 어려서 목숨은 살려주었고요). 살릴 사람은 살리고 죽일 사람은 죽이면서 나라의 안정을 추구한 헨리 7세의 모습이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는 우리나라 시국 속에서 어떻게 해야 화합할 수 있을지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번역 이야기를 해 볼게요. 원문에 'The king's reinstatement'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reinstatement'는 사전에 따르면 복위를 의미하죠. 1455년 세인트 올번스 전투가 시작될 때를 다루는 대목입니다. 세인트 올번스 전투를 기점으로 장미전쟁이 시작되었죠.장미전쟁 때 재위한 왕은 헨리 6세인데, 헨리 6세가 복위한 해는 1470년입니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헨리 6세는 폐위되었으나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와 대립하면서 다시 헨리 6세를 옹립하거든요. 그런데 왜 1455년에 'reinstatement'라는 단어가 나왔을까요? 뒷 구절을 봐야 합니다. 'reinstatement' 뒤에 왕비와 서머셋이 주축이 된 파벌에 의지했다고 나와요. 헨리 6세의 생애를 알아봅시다. 헨리 5세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 만에 왕위에 올랐어요. 오랫동안 미성년이었던 탓에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정치를 했죠. 왕비는 앙주의 마거릿으로 야심 찬 여자였고 서머셋은 왕의 총신입니다. 그래서요? 'The king's reinstatement'앞에 역사가 로빈 스토리의 발언이 인용됩니다. '헨리의 광증이 비극이라면, 헨리의 회복은 국가의 재앙이었다.'라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광증이 왜 나오죠? 헨리 5세는 프랑스 왕비와 혼인하여 헨리 6세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왕비는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샤를 6세의 딸이었고, 헨리 6세는 외조부에게서 정신질환을 물려받았어요. 헨리 6세도 종종 정신병에 시달렸죠. 그런데 왜 헨리의 회복이 국가의 재앙일까요? 헨리 6세는 오랫동안 타인에게 의지했습니다. 의지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위에서 나옵니다. 왕비와 서머셋이 주축이 된 파벌에 의지했다고요. 즉, 헨리 6세가 정신이 나갈 때마다 요크파는 승기를 잡았으나, 헨리 6세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왕비와 서머셋에게 의존하는 거죠. 평소에 하던 대로요. 여기서 'reinstatement'는 '의식을 되찾다'라는 뜻이죠.
《Anne Neville: Richard III's Tragic Queen》이 지닌 장점과 단점
이 책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합니다. 이름이나 연도에서 자잘한 실수가 보인다는 거죠. 세실리를 앤이라고 쓰거나, 1년을 3년으로 쓴 게 대표적이죠. 번역하면서 자료조사를 통해 오류를 바로 잡았으나, 이 부분은 한국 편집자의 감수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존에 따르면, 이 책은 추측과 가정으로 이루어졌다는 평이 있어요. 이건 앤 네빌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아서 온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계는 도리어무엇이 추측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명확하게 구분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고요. 또한 전쟁 속에서 소외된 여성의 삶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산 앤 네빌의 생애를 통해 중세 시대 왕족 여성의 삶은 어떠했는지, 장미전쟁이 영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머나먼 나라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2월 8일에 시작했고 오늘 5월 10일이니, 브런치에 입성한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구독자도 204명으로 늘었고요. 새로 구독해주신 분도 계시고 빠져나가신 분도 계셨어요. 사실... 구독자 한 분 한 분 들어오시고 나가실 때마다 살이 떨렸어요. 최근 번역 관련 글을 올리지 않아서 구독을 끊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던 나란 사람. 결심했습니다. 초심을 유지해야겠어요. 브런치에 작가 신청할 때를 떠올리면서요.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3일 뒤에 바로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비결이요? 저만의 특색을 보여준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브런치에 입성한 번역가분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설명하는 번역가 지망생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추측합니다. 역사인물 매거진도 쓰면서 번역 관련 근황도 알려드릴게요.
다음으로 기획한 책은 70년 동안 왕자리를 유지하는 여왕님을 다룬 작품입니다. 여왕님을 메인으로 삼은 책이 우리나라 시장에 없어서, 어느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야 할지 고민됩니다. 역사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노리고 있는데, 여왕님이 현역이라 역사 인물이라고 봐야 할지 애매합니다. 그래도 인물들의 행적이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계속 글을 쓰면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는 고전으로 남지 않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