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왕과 왕비의 혼인은 정략으로 맺어졌습니다. 집안과 집안 간의 연결이었기 때문이죠. 결혼한 두 사람은 집안과 집안 사이를 돈독히 해야 할 의무가 있었어요. 좋든 싫든 해야 할 일이었던 거죠. 왕비의 경우 주로 내조의 길을 택합니다. 왕을 충실히 보필하여 성군으로 만들거나, 소외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 왕비들의 의무였죠. 하지만 내조에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어요.왕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어떤 정치적 상황이었는지에 따라 왕비의 운명도 정해지기 때문이었죠.그렇기에 왕비의 인생은 살얼음판이었습니다. 특히, 집안과 집안을 넘어 나라와 나라가 연결된 경우엔 더욱더 그랬죠. 이번에는 프랑스의 공주로 태어나 영국의 왕비로 살아간 여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내용이 길어서 1편과 2편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의 공주, 앙리에트 마리
1609년 11월 25일, 헨리에타는 프랑스 앙리 4세와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막내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프랑스식 이름은 '앙리에트 마리'였죠. 루브르 궁전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왕비 마리가 섭정이 되었죠. 장남 루이 13세가 아직 어렸거든요. 그녀는 왕비와 루이 13세의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서 가톨릭교도로 성장했는데,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정국은 불안정했습니다. 왕비는 프랑스 내의 가톨릭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앙리 4세의 총신들을 축출했죠. 자신의 측근들을 총애하면서 전횡을 휘둘렀고요. 또한 루이 13세와 스페인 공주 안 도트리슈를 강제로 혼인시켜서 루이 13세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주물렀어요. 왕비의 전횡 속에서 이를 갈던 루이 13세는 1617년 4월, 왕비의 총신을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합니다. 1620년, 왕비는 내전을 일으켰지만 왕비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왕비가 궁에 기거하는 것으로 타협하면서 두 사람은 화해를 했죠. 이처럼 앙리에트는 어머니와 오빠가 정권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프랑스의 공주 앙리에트 마리(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우연스럽고 운명적인 악연
1623년, 앙리에트는 파리의 프랑스 궁정에서 찰스 왕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찰스는 처음부터 그녀와 혼인하려 했던 게 아니었어요. 스페인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던 중, 잠시 프랑스에 들른 것이었죠. 그런데 찰스가 스페인에 도착하자, 스페인 왕은 굴욕적인 조건을 내세웁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년간 스페인에 체류하라고 요구한 거죠. 스페인 왕의 무례한 행동에 격분한 찰스는 협상을 파투 내고 아버지 제임스 1세에게 스페인하고 전쟁하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다른 신붓감을 찾기 시작하죠. 바로, 스페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랑스에서요(스페인과 프랑스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루이 13세가 스페인 출신 왕비 안 도트리슈와 갈등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1624년 앙리에트는 15살로, 아름답고 고상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죠. 눈, 코, 피부 등 모든 게 완벽했다고 하죠. 웃을 때 이빨이 튀어나오는 게 흠이었지만요. 찰스는 우아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당시 24세였어요(찰스가 제비뽑기로 앙리에트를 뽑았다는 일화가 있긴 합니다).
찰스 1세의 왕자 시절(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불행의 씨앗
1625년 5월, 두 사람은 파리에서 대리 결혼식을 치르고 6월 13일, 두 사람은 잉글랜드의 수도원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결혼식을 두 번 하네요). 그런데 대리 결혼식 때 찰스가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데,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되죠. 게다가 2월 2일에 찰스는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찰스 1세로 즉위했는데, 앙리에트는 대관식을 치르지 못합니다. 앙리에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대관식은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이죠.앙리에트는 가톨릭 주교가 왕관을 씌워줄 수 없냐고 묻지만, 찰스는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결국 그녀는 멀리서 대관식을 지켜보기만 했죠.
타국의 왕실 속에서 고립된 왕비
헨리에타는 왕비가 된 후, 잉글랜드 왕실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합니다. 그녀는 평생 영어를 접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었죠. 결혼식 후 10년간 문맹이었다고 해요. 더구나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어요.잉글랜드는 오래전부터 성공회와 가톨릭이 대립하다가, 성공회 쪽이 정권을 잡은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왕이 가톨릭 신자인 왕비의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워한 거죠. 더구나 찰스 1세의 결혼은 버킹엄 공작이 주도했는데, 당시 버킹엄 공작은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저지른 실책 때문에 의회의 지탄을 받고 있었었어요. 원래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를 돈독히 하기 위해 추진한 결혼이었으나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 이후 수백 년간 골이 깊어진 관계였고, 이 결혼만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아질 리가 없었어요.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반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죠.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마리아, 메리, 앙리에트
주위 사람들의 따돌림과 경계심 때문에 고통스러워진 그녀는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선택합니다.남편이 지어준 애칭도 거부했죠. 찰스는 그녀를 "마리아"라고 불렀고, 영국인들은 찰스의 할머니 이름을 따서 "퀸 메리"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그녀는 "앙리에트"라는 이름을 고수했죠. 또한 아들들을 성공회 신자로 키우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길가에서죽어가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소란을 일으켰죠.심지어 가톨릭식 결혼까지 주선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내에서 심각한 범죄였어요. 헨리에타가 데려온 가톨릭 수행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탓에 잉글랜드 왕실에서 그 사람들의 막대한 체류비를 감당해야 했고요. 이를 보다 못한 찰스는 가톨릭 수행인들을 궁정에서 모조리 내보냈어요. 헨리에타에겐 가톨릭 사제 한 명과 시녀 몇 명만 남았죠.
사랑이 시작되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헨리에타가 모국 프랑스를 향한 창가 주변을 서성이자, 이에 격노한 찰스는 헨리에타를 더 멀리했죠. 싸우고 반목하고 멀리하는 날이 반복됩니다. 사실, 찰스 1세의 총신 버킹엄 공작의 이간질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악화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어요(본인이 결혼을 주도해놓고 왜 그랬을까요). 간신 버킹엄 공작이 1629년에 암살당하자, 두 사람의 사이는 바로 좋아졌죠.애정 어린 사랑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헨리에타는 짓궂은 농담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궁정에서 곡예를 부리던 난쟁이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난쟁이들의 곡예를 보는 것을 즐겼죠. 남편에게 "난쟁이를 파이로 구워서 당신 앞에서 뛰게 할래요"같은 농담을 하기도 하고요(좀 섬뜩하네요). 두 사람은 미래의 찰스 2세가 될 아들을 낳고 더욱 돈독해졌고, 찰스 1세는 편지에서 헨리에타에게 자주 "내 사랑"이라고 불렀어요. 헨리에타는 연극을 좋아해서 많이 후원하였고 남편 앞에서 직접 가면극을 펼치기도 합니다.당시 연극은 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어요.
반 다이크가 그린 찰스 1세의 초상(출처: webarchive.nationalarchives.gov.uk)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고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 동안,사람들은 두 사람을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잠시 정치 이야기를 할게요. 찰스 1세는 왕이 된 이후, 절대왕권을 신봉한 탓에 의회와 자주 갈등을 일으켰어요. 버킹엄 공작이 암살된 후에도 무리한 해외 원정으로 세금이 과중되니, 의회는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죠. 찰스 1세는 의회의 태도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죠. 왕의 승인 없이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니까요. 결국 1629년부터 1640년까지,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영국의 귀족이나 주교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왕이 가톨릭을 가까이하게 될까 봐 우려합니다. 그들의 우려대로,헨리에타에게 감화된 찰스 1세는 점차 프랑스와 가톨릭에 친밀함을 느낍니다.정치할 때도 헨리에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요. 왕비가 의원이 되지 못한다고 자주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어요. 그러자 1630년대부터 그녀를 비판하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다가, 헨리에타를 대놓고 욕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2편에서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