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타락한 시대'입니다. 지식인들은 3.1 운동 실패 후 독립운동이 아니라 돈과 쾌락에 에너지를 쏟아부었죠. 충, 효, 우정, 의미 같은 구시대적 사상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사라진 사상들의 자리는 연애와 섹스가 채워버렸죠. 한쪽에서는 강명화-장병천, 윤심덕-김우진 등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다른 쪽에서는 성매매가 본격화되면서 약 5천 명에 달하는 매음녀가 영업하였답니다. 조혼, 가정 폭력, 남편 독살 같은 흉흉한 일도 종종 발생했고요. 제 생각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도 실패하고 출세할 구멍도 솟아나지 않자,마음속에 품은 한(限)을 연애와 섹스, 범죄로 푼 것 같아요.망국의 주범이라 불렸던 조선의 황족들은 어땠을까요? 상당수는 친일파가 되거나 탕아로 살았다는데요. 무기력함 때문일 수도 있고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을 수도 있죠. 죄책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시대 분위기는 암울했지만, 모든 사람이 타락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마음속에 품은 한을 사랑으로 승화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람의 생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황태자비가 될 수 있었으나...
이방자의 1901년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 守正王)과 화족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혼인 전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였어요. 친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은 닌코 천황의 조카이자, 메이지 천황의 사촌이었죠. 즉, 마사코는 황실의 분가 출신이었던 셈이에요. 황족 여인에 걸맞게 이방자도 가쿠슈인 여학부에 진학해 훌륭한 귀부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어요. 한때 황태자비의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던 마사코.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더라도 황족이나 화족의 아내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본인 모르게 결정된 혼인
1916년 8월 3일, 『요미우리』에 이은 왕세자와 마사코가 혼인한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마사코는 신문을 보고 혼인 소식을 알게 되었고 크게 놀랐습니다. 마사코의 부모님은 황후에게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냐고 물었으나, 황후는 기꺼이 나라를 위해 희생해 줄 것을 요구하였어요. 마사코는 결혼은 조선과 일본 왕실을 묶어 놓기 위한 일본 정부의 음모라고 생각하였죠.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족 여자는 황족이나 화족에게 출가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일본은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황족 여자는 왕공족과 혼인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신설할 정도로 이 결혼에 열의를 보였거든요. 조선과 일본 황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두 황실은 혈연관계로 얽히고 내선일체를 더 수월하게 실시할 수 있잖아요. 이은 왕세자도 신문을 보기 전까지 결혼 소식을 알지 못했어요. 이은은 11살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와 일본 왕실에 소속된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해 일본 정부의 감시 속에서 교육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래서일까요. 마사코는 약혼 전까지는 조선에 관심이 없었으나, 약혼 소식을 들은 후 하루아침에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격하된 영친왕의 처지를 동정하였죠.이때부터 마사코는 한일관계와 조선의 왕세자비로서 짊어진 책무를 깨닫습니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젊은 시절(출처: 위키백과)
순탄치 않은 결혼 과정
1918년 12월 8일, 약혼을 치르고 3일 뒤 이은(영친왕)을 처음 만납니다. 마사코(이방자)는 영친왕을 왜소하지만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사람으로 평하였죠. 정치나 내선일체에 상관없이 이 남자의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합니다.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찾아가 조선의 역사와 풍습을 배우면서 결혼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결혼을 나흘 앞두었을 때, 영친왕은 고종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조선으로 향했고, 영친왕이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고종황제가 서거합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전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죠. 이방자의 집안에는 수시로 협박 전화가 걸려왔어요. 결혼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요. 이방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가족들도 결혼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자는 단호하게 영친왕과의 결혼을 선택했어요. 나는 이은 전하 개인에게 시집가는 거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시집가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가 남긴 와카를 보면 조선인의 슬픔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방자 본인은 시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와카(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이다. 5음과 7음의 일본어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두 수를 남겼는데, 그 와카에 '나도 슬픈데 조선사람의 비탄이 생각된다'라는 구절이 있거든요.조선인의 슬픔을 헤아리면서 아직 조선인이 되지 못한 그녀의 비애가 묻어납니다. 더구나 이방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순탄하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죠. 이 운명을 이겨내겠다고 각오하면서요(조선인의 슬픔은 자각했으나 아직 조선인의 분노는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요. 조선인들이 3.1 운동을 한 이유나 반일감정이 격화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회고록에 술회하지 않았거든요).
혼인 뒤 찾아온 첫 번째 시련
1920년 4월 28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치렀습니다.결혼 후, 영친왕은 육군 대학에 입학하고 이방자는 조선인 직원들을 불러서 조선의 풍습과 예절, 한복을 입는 방법을 배웠어요. 이토 히로부미 부인에게서 배우는 거랑 조선인에게서 배우는 건 많이 다르겠죠? 이런 일화도 있어요. 언제 이방자는 파란색 무늬가 있는 한복을 입었어요. 영친왕은 아내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고, 이방자는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앞으로도 한복을 자주 입겠다고 결심했죠. 이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1921년 8월 18일 장남 이진이 태어났어요. 두 사람은 아들의 재롱을 보며 흐뭇했지만, 다음 해 4월 서울을 방문한 뒤 아들이 변을 당합니다. 조선 왕실의 대를 끊기 위해 독살했다는 설이 퍼졌죠. 그러나 실의에 빠진 이방자는 나 때문에 아들이 불행을 겪었다고 믿었어요. 아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컸던 것 같아요. 동시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어두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하면서요.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 부부(1923년) (출처: 위키백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개심뿐...
1923년 9월 1일, 간도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도쿄는 초토화됐죠. 도쿄 시가지 3분의 2가 불에 타고 10여만 명의 시민이 죽고, 340만 명의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었어요. 이 틈을 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우물에 독약을 타고 방화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떠돕니다. 일본인들은 분노의 화살을 조선인에게 돌리고 이는 조선인 학살로 이어집니다. 분노한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킬까 봐 두려웠던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묵인하죠. 일본 황실의 보호(를 가장한 감시)를 받던 영친왕과 이방자는 조선인들이 학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친왕도 조선인이니 신변이 위험할 수 있어서 두 사람은 궁내성 안의 텐트로 피신합니다. 이방자는 괴로워하는 영친왕을 보며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드디어 일본의 잔악함을 몸소 깨달았죠. 이제 이방자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조선 사람처럼 일본에게 적개심을 갖는 것이었습니다.조선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동질감을 갖게 되었죠.
덕혜옹주에 대한 연민
1925년 3월 30일, 두 사람은 도쿄 역으로 가서 덕혜옹주를 마중합니다. 덕혜는 영친왕의 이복동생으로 덕수궁에서 자라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유학을 하게 됐죠. 이방자는 덕혜의 얼굴이 수척했고 피로에 지쳐 보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친왕은 이방자에게 내 유일한 혈육이니 잘 돌보아 달라고 했지만, 덕혜가 가쿠슈인 기숙사로 가게 되면서 그마저도 할 수 없었죠. 이때 덕혜는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덕혜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을 발표했죠. 이방자는 이번에도 혼인을 통해 두 황실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계략을 짐작했고, 이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분개했죠. 남편과 올케의 처지가 오버랩되었던 것 같아요.
덕혜옹주 회갑상, 맨 왼쪽이 이방자이다(출처: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블로그)
장애인들의 어머니가 되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이방자는 영친왕을 따라 재일 한국인이 됩니다. 이때 '마사코'의 한국식 발음인 '방자'로 개명했죠. 하지만 일본 황족에서 제명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해서 힘들게 삽니다. 입을 옷이 없어 커튼을 뜯어 블라우스를 만들었다는 일화까지 있다고 해요. 두 사람은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그들의 귀국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63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때 영친왕은 뇌일혈과 실어증으로 의식불명이 된 상태였어요. 이방자는 한국에 온 뒤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면서 장애인과 주부 대상으로 칠보공예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순정효황후와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시누이 덕혜옹주를 보살피며 효를 다했죠. 1970년 영친왕이 타계한 후에도 남편의 유지에 따라 자혜학교, 명혜학교, 명휘원 등을 설립해장애인의 자활과 재활을 돕는데 헌신하였어요.
이방자 여사 30주기 기념전에 출품한 ‘한매쌍작’ (출처: 한경닷컴)
1989년 4월 30일, 이방자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타계했습니다. 사후 남편 영친왕이 묻힌 영원에 합장되었고 남편과 함께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어요. 이방자는 생전에 "일본은 나를 낳아준 나라이고 한국은 내가 묻힐 나라이다.두 조국을 모두 갖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살 때 일본 옷을 입지 않으면서, 한국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제 생각에는 두 조국을 모두 품기 위함인 것 같아요.
이들의 사랑이 의미 있는 이유는 현실이 비극적이었으나 타락하지 않고,자신들이 품은 한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조선 황족들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던 것과 비교해보면요(영친왕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 때문에 친일파 취급을 받기도 했어요. 실제 독립운동가들도 영친왕을 매국노로 여겼죠. 광복 후에 한국인들도 냉대했고요. 하지만 일본군을 선두 지휘했던 입장은 아니라... 어릴 때 인질로 끌려갔던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