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밀린 Jun 11. 2023

사이비가 되어버린 내 단짝 친구

나를 만나고 싶다는 너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주말에는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내가 너를 만난다고 해서 너의 세상이 바뀔 수 있는지를 조금은 고민했다


약속했던 주말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잠을 설쳤던 탓인지 살짝 피곤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너를 만나면 안 된다는 친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너의 진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너희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사장님에게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너와 내가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손님이 없는 애매한 오후를 약속 시간으로 정한 이유도 너와 진솔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한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너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주말이 되면 집의 초인종을 거리낌 없이 누르며 함께 게임을 하는 친한 친구였다.


그렇게 어김없이 함께 게임을 하고 너와 저녁을 먹던 중, 내가 곧 이사를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너에게 이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는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어차피 연락 자주 하면 크게 문제 될 일 없을 거야"라고 얘기하며 서운해하는 나를 달래주던 너는 분명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우리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로 인해 연락이 점점 뜸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어 천천히 잊힌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음침한 사람들과 얘기 중인 너의 모습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예전 모습과 겹쳐 보이는 지금의 너를 보며, 나는 반가운 마음에 네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나를 알아본 너 역시 나를 몹시 반가워했다.  


나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십 년 동안의 공백을 몇 분 동안의 대화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너는 이런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선뜻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나는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알려줬던 친구들이 하나 같이 기겁을 했다


한 친구는 '그 친구가 몇 년 전부터 신천지에 빠져 다른 친구들을 포섭하고 있다'며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수학경시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아 올 만큼 똑 부러졌던 네가, 신천지에 빠지게 되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너에게 오는 연락이 사실은 나를 포섭하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나왔다


너는 종종 내게 연락을 했었다


주로 '저번에 못 봤는데 함 봐야지', '아직 고향에 있어?', '속초 맛집 많이 생겼더라 혹시 OO 가봤어?'와 같은 얘기였다



그렇게 나는 너와 안부를 묻고 그동안의 추억을 회상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천천히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웬일인지 너는 내가 처음 보는 원인 모를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있는 힘껏 머리에 힘을 준듯한 너의 부자연스러운 올백 머리와 그와 상반되게 초췌한 여자...


친구들이 얘기했던 그 소문처럼 충분히 현실에 찌들어 보였고 옷 차림새도 가식적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하던 너의 모습은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인스타에 보여주는 그런 평범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게 느끼한 머리 스타일로 가볍게 커버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내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미리 얘기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함께 오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고 이 여자에게 단 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꺼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오해했던 것 일수도 있으니 일단 너와 얘기를 나누며 상황을 살피고자 했다.



너와 그 여자가 음료를 주문하러 갈 때, 나는 여름이라 목이 말랐던 탓인지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이동했다.


"어머.. 혹시 저희 커피 사주시려고 같이 움직이거에요?", "감사합니다"


그 여자가 한 말에 '뭔 개소리지.. 내가 내 커피 먹겠다는데 왜 네가 X랄이지.. 거지새낀가..?' 싶었다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마실 음료를 가져온 뒤 너와 오랜만에 안부를 전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얘기해도 부족할 시간이었는데, 간단한 안부가 끝나자마자 너는 그 여자분을 소개해줬다


이 여자가 너의 여자친구였다면, 단 둘이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며 '이 연애 나는 반댈세!!!'라고 얘기하고 싶을 만큼 그 여자는 뭔가 어벙해 보이고 지질해 보였다


입은 옷도 깔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힙한 패션도 아닌 것이 무언가 복고 시대를 연상케 하는 신개념 패션이었다.



망령. 나는 그녀를 망령이라 부르기로 했다


사회에 어울리지 못한 채 주변을 배회하는 망령, 이 망령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결국 사회와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 망령은 자신을 컬러리스트라 자처하며 나에게 '컬러 테스트'를 제안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지 않아?"라고 네가 얘기했지만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유 있는 반항심,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 그 여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가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광기에 가득 찬 눈동자' 얘기가 나오지만 나는 살면서 그런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눈동자를 봤었다면 그것은 흡사 저 '동태 같은 여자의 눈' 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은 무조건 피해야 되는 사람이다' 내 촉이 본능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시선을 회피하고자 너를 바라보니 너의 눈에는 어딘가 생기가 없어 보였다


'아... 내가 지금 망령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구나...'



그때 여자 망령이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책을 펼치며 말했다


'자 그럼 말도 나왔겠다 제가 무료로 한번 테스트해 드릴게요, 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보세요..!'


이미 들어올 때부터 책을 들고 있었으면서 왜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 여자 망령을 약 올리고 싶은 마음에 보이는 족족 빨간색을 골랐다.


보여주는 페이지에 빨간색이 없으면 맘에 드는 색깔이 없다고 얘기했다



여자 망령이 크게 당황하며, 다른 색도 골라보라고 했지만 계속 빨간색을 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온통 빨간색뿐이었다.


지금 내 심정을 이 망령들에게 조금이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이내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 생각보다 화가 많은 사람이시네요..."라며 여자 망령이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망령들은 몇 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급하게 화제를 돌린 그 얘기가 자리를 박차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따 저녁에 같이 삼겹살이나 먹을까..?"라고 망령이 된 내 친구가 얘기했다


"오 그러면 친구분이 삼겹살 사주시는 건가요?!"라며 여자 망령이 덧붙였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도저히 이 망령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나는.. 급하게 가방을 챙기며 저녁 약속을 핑계로 그 자리를 나오게 되었다


 


그때 여자 망령은 남자 망령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낸 것만 같았고,


남자 망령은 나를 배웅하며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다는 얘기를 꺼냈다


네가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했을 때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얘기했다


네가 '만나서 반가웠다'는 얘기를 했던 그 순간은 '내가 알던 너였을까'라 생각하며 서로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너와의 추억을 마무리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과거의 친했던 네가 이 현실에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사람을 되려 이용해 먹으려는 망령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잠에 들기 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왔다.


오늘 만났었던 여자 망령이 '집에 조심히 잘 들어갔냐'라고 문자를 보냈던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는 '갓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