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스 12,000원
바람이 쌩쌩부는 퇴근길, 외곽 도로로 빠져나와 길을 걷다 보면 새빨간 색으로 나의 눈길을 휘어잡는 딸기 한 박스가 과일 가게에 진열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 가격을 보니 유독 비싼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렇게 겨울이 다가올 때 따뜻한 방 안에 누워 딸기나 귤을 맛보는 그러한 상상을 하다 보면 저절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겨울에는 딸기가 생각나고 여름에는 수박 주스가 생각나는 것처럼 취미에도 제철이 있다. 좀 더 풀어보자면 그 날씨에 어울리는 한정적 취미가 있달까? 날이 덥고 추워짐에 따라 나의 입맛도 바뀌는 것처럼 지금처럼 추워지는 날씨에만 즐기기 좋은 취미들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취미들을 여러 가지 들고 왔다.
대표적으로 밖으로 나와 즐길 수 있는 취미들을 생각해 본다면 스키와 보드, 스케이트와 같은 스포츠들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가족들과 종종 보드를 타기 위해 강원도에 있는 철원 스키장으로 향하며, 잘 타지도 않았던 보드를 눈에 미끄러지게 둔 채 엉덩이를 꽈당 넘어져가며 타기와 넘어지기를 반복했었다. 시간이 흘러 항상 젊으실 것 같았던 화자의 부모님도 뼈와 관절에 민감한 시기가 찾아왔고, 스키장을 타기 무서운 나이가 되어버렸다.
5년 전 화자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보드를 타다가 엉덩이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스키장은 가족들과 함께 가기에는 위험천만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도 그 순간이 그립다. 산 중턱을 내려와 휴게소에 들러, 연기가 끝도 없이 올라오던 가락국수와 호호 불어 먹어먹는 핫바. '어쩌면 그것을 먹기 위해 나는 보드를 타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추억 말이다.
최근 스키나 보드를 타러 가고 싶은 생각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1. 숙소는 어떻게 구하며 2. 운전은 어떻게 하고 3. 리프트는 얼마나 쓰고 4. 대여는 어디가 저렴한지, 이 모든 정보를 알아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그냥 서울 근처에 있는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았기에 잠실에 있는 아이스 링크장으로 향했다.
개인적으로 올해 경험했던 체험 중에 세 번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만족했다.
그 당시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이라 사람이 많긴 했으나 인적인 많은 시간대를 피한다면 제법 넓은 아이스 링크장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대여도 현장에서 가능하고 생각보다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요령이 필요하지 않기에 가벼운 산책을 희망한다면 아이스 스케이트장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처음 얼음을 내딛고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 때, 아기의 첫걸음마를 경험하는 것처럼 바닥의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재밌는 경험이었다. 가끔 나보다 빠르게 질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 나름대로의 템포를 맞춰가며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면 1~2시간이 의외로 순삭 되는 기이한 환경을 확인할 수 있다. 약간의 팁이 있자면 중간중간에 정빙 시간이 있어 시간표를 참고하면 더 재밌게 즐길 수가 있다. 그리고 타다 보면 열이 올라 생각보다 더워지니 외투도 보관함에 넣어두자
반면 이런 날씨를 이용하는 것보다 방패로 삼듯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취미들을 더 좋아하고 이 추운 날씨와 싸우는 경험을 하지 않아 이 방법을 더 선호한다.
(때로는 맞서 싸우는 것보다 잘 피하는 것 또한 방법이기에)
눈이 오기를 기다려왔다.
나이가 들수록 눈은 그저 하늘이 내리는 디버프 같은 것이라 생각했던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이번은 겨울은 다르다. 큰 맘먹고 눈사람 집게를 산 이유가 그중 하나인데 작년 집 앞에 한 없이 만들어져 있었던 오리 눈사람을 보고 내년에는 나도 저런 눈사람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는 집념하에 오늘을 기다려 왔다.
"밀린아 밖에 눈 오는데...?"
여자친구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쿠로미 눈사람 집게'를 챙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나의 모습에 여자친구도 당황하지만 이내 코트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한다. 그렇게 여자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와 눈의 상태를 살피며 본격적으로 눈사람 만들기를 시작했다.
집게로 눈사람을 몇 번 만들어 보면서 잊고 있었던 점은 '맨손으로 눈을 만지는 것은 예상보다 차갑다'는 것과 '눈에 어느 정도 습기가 머금어야 눈사람 모양이 잘 나온다'는 것이었다.
눈이 퍼슬퍼슬하면 기운 없는 안락미처럼 후 불면 날아가는 모양이 돼버리고 말더라.
몇 번의 시행착오를 끝에 제법 그럴 만한 눈사람을 만들게 되었다. 나름대로의 뿌듯함과 이 작품이 조금은 오래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다음날 누가 바로 부셨다). 그런 마음을 가지며 집으로 복귀를 하는 상황에 또 다른 커플들이 집게를 들고 오리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동심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가깝게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취미에도 집 안에서 칼바람을 약 올리는 '동면 라이프'를 이길 수가 없다. 평상시에 방 안에 있는 것과 날씨가 추워 방 안에 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전자가 더 집을 소중히 여겨주는 매개체를 해준달까?
'집이 없었으면 이렇게 추운 공간에 있어야 하는 거구나'
이때 하는 그 모든 활동들은 야생동물들이 음식을 먹고 낮잠을 자는 것처럼 생존적인 것이며, 그것은 죄책감이 들지 않는 당연한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내가 따뜻한 장판에 누워 귤을 먹는 것 또한 생존의 일부이고,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집에 있어야 안전하고 집에 안전하게 있어야 다음 날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공간을 상상하고 있자면 매섭게 다가오는 한파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개인 주택에 살면 그 눈을 치워야 한다는 망상은 나를 괴롭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날이 춥다.
앞서 말했던 행동들 밖으로 나와 움직이는 것, 집에서 뒹구르르 하루를 보내는 것 또한 몸이 건강한 상태여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취미들이다.
아프면 아파서 쉬는 것이기에 그것은 취미로 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 한파를 교묘히 잘 피해 가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에 각자의 취미를 즐기는 그런 주말과 하루를 보내기를 소망해 본다.
이 추위가 지나가면 날이 풀리듯이, 경직되었던 우리의 일상도 언젠간 풀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