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던 곳은 바로 나의 첫 직장이었다. 학창 시절, 그리고 부모님께는 별로 받아본 적 없던 환대에 얼떨떨했다. 처음엔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의상 하는 선의의 거짓말일 것이라 생각하며 속으론 부정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손 많이 가는 아픈 손가락, 매일 사고만 치는 사고뭉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아이였다. 처음으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 낯설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어느 곳에서 일을 하든 항상 그런 칭찬을 들었다. 나는 눈치 빠르게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척척 해나가는 센스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성실하게 꾀부리지 않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인정받기 위해 선택한 나만의 방법이다. 공부는 내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지만, 일은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로 나타나서 기뻤다.
그런데 그런 칭찬과는 대조되는, 자주 듣던 말이 또 있다.
"뭐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 너무 무리하지 마. 적당히 해."
나를 유독 괴롭히는 말이 있다.
"너 바보야? 그것도 못해?"
이 한 마디는 나의 열등감을 가장 자극하는 말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많이 들었던 가장 상처되는 말이다. 그 말 자체만으로도 상처인데, 그걸 동생과 비교당하면서 들었을 때 가장 속상했다. 아빠는 우리 두 자매에게 똑같은 산수 문제를 내고, 누가 더 암산을 빨리하는지 경쟁하는 시합을 자주 시켰다. 처음에는 당연히 내가 이겼다. 그런데 한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동생의 암산 실력이 나를 따라잡았다. 4살이나 어린 동생이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매우 자존심 상하고 분했다. 동생보다 산수도 못하냐며 비웃듯이 나를 놀리던 아빠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아빠가 동생보다 더 얄미웠다.
다른 과목에 비해 눈에 띄게 유독 수학 과목에서 좀처럼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또렷하게 그날의 일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엄마는 지역 신문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무릎을 탁-쳤다.
"여기다. 여기를 보내야겠다. 여기를 다니면 네가 수학 점수가 오르겠다."
아무리 해도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자 급기야 엄마는 수학 영재 학원에 나를 보냈다. 정확한 출신 대학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당시 우리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어서 엄마들 사이에서도 이슈였을 만큼 선생님들 모두 학력이 출중하셨다. 그곳엔 수학 경시 대회를 준비하는 수학 영재들이 즐비했다. 학교 수업도 버거워하던 내가 그곳에서 잘 적응했을 리 만무하다. 항상 혼자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남들보다 한 시간씩 일찍 학원에 와서 수업 중인 학년이 다른 어린 동생들 옆에 앉아 혼자서 문제를 풀었다. 공부를 배로 더 열심히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진 않았다. 점점 주눅이 들었고 더 자신감을 잃었다. 그렇게 노력해도 마음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는 내 머리를 자책하면서.
학원비가 다른 일반 학원의 약 두 배가량은 됐던 것 같다. 엄마는 매 달 학원비가 담긴 두툼한 흰색 봉투를 나에게 전달할 때마다 이렇게 비싼 돈 주고 학원을 보내주는 데 왜 수학 점수가 오르지 않냐며 잔소리하셨다. 나는 그 봉투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되시는지 가끔 뜬금없이 그때 이야기를 꺼내곤 하신다.
"아직도 나는 그때 수학 영재학원에 너를 보냈던 게 제일 후회가 된다. 돈만 날렸지. 그때 너 학원 보냈던 돈이랑 네가 풀지 않고 산처럼 쌓아두고 버렸던 문제집들만 아꼈어도 내가 건물 빌딩 하나는 세웠을 거야."
그놈의 빌딩. 엄마의 18번이다. 엄마가 샀을 빌딩은 과연 얼마일까? 내 학원비에 그렇게나 많은 돈이 들어갔던 걸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엄마는 알까? 살면서 엄마의 그 수많은 선택들 가운데 어떻게 그 일이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집이 가정 형편이 좋았다면 나는 좀 덜 죄책감이 들었을까? 부모님이 힘들 게 번 돈이 몽땅 내 학원비로 들어가는데, 무용지물이었던 것을 알았을 때의 죄책감. 돈 낭비. 시간이 많이 흐르고, 엄마가 습관처럼 또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한 마디 했다.
"내가 언제 그 학원 보내달라고 한 적 있어? 그러면 보내지 말지 그랬어. 나는 정말 다니기 싫었다고."
그러면 꼭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또 그런 소리를 하네? 엄마, 아빠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힘들게 번 돈으로 기껏 학원 보내놨더니! 엄마였으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을 거야. 엄마는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공부를..."
또 이 레퍼토리다.
엄마는 8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나,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하셨다. 더 많은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많은 한이 맺히셨는지 자주 내게 하소연을 하셨다.
"엄마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했는데, 너는 엄마가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지원해 주는 데 뭐가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니?"
엄마는 그 한을 나에게 푸셨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엄마.
경제적 환경이 뒷받침되는데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나.
나는 그때마저도 엄마와 비교를 당했다.
'가끔은 왜 하필 내가 첫째로 태어났을까? 차라리 공부 잘하는 동생이 첫째로 태어나고 내가 둘째로 태어났으면 부모님과 나도 덜 힘들었을 텐데' 하고 자주 생각했다.
'나라고 뭐 못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잘하고 싶어.'
"뭐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 너무 무리하지 마. 적당히 해."
처음엔 내가 너무 예쁨 받으니 시기 질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크게 아프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인 '일'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내가 안쓰러워서 해준 진심 어린 조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나를 사랑해주어야 하는데, 왜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면서까지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
왜? 무엇을 위해서?
칭찬받고 싶어서?...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는 그때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그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너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최선을 다했던 거 내가 알아.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나의 바람보다는 엄마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다그치기만 해서 많이 서운했지?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어. 그런 열등감이 있었기에, 네가 직장을 다니며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 너 자신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랑해 주자. 누군가에게 좀 인정받지 못하면 어때? 가끔은 못한다고 지적 좀 받으면 어때? 그래도 괜찮아. 그렇다고 해서 너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야. 너는 여전히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