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

by 이경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느라 열중하는 아이를 묵묵히 지켜보시며 흐뭇한 웃음을 지으시던 오래전 부친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철부지 아들놈이 웬일인지 그날만큼은 마른침까지 꼴깍꼴깍 삼켜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으니, 딴에는 궁금하시기도 하셨던 모양입니다. 도화지 속 마당에는 닭과 강아지가 이리저리 쫓아다녔고,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는 오리가 떼 지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지요. 게다가 창문이 여럿 달린 양옥(洋屋) 앞에는 둘러서서 환히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아이는 나중에 자신이 크면 그런 집에서 가족 모두가 오순도순 모여 함께 살 거라는 거창한 포부까지 덧붙였던 듯도 합니다. 물론 고단한 삶의 여정(旅程)을 거치며, 도화지 속에서 꿈꾸었던 아이의 소중한 바람은 조금씩 조금씩 그 빛이 바래긴 했습니다만.


‘삶의 가치...’

가치(價値)란 말 속에는 우리네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나 관심의 대상을 가리키는 철학적 의미도 들어있지요. 과연 한 갑자(甲子)를 돌아오는 동안 소중하게 여기며 간직해 왔던 가치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던가 싶어 곰곰이 되짚어보게 됩니다. 그동안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어온 이들과의 화목(和睦), 옳고 그름을 살펴서 판별하고 실행할 수 있는 예지(叡智)와 용기(勇氣), 허술하고 모난 것들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는 배려(配慮)와 포용(包容) 등등…. 딴에는 거창하게 벌여놓기는 했습니다만, 무에 하나 제대로 체화(體化)해 온 게 있느냐는 자문(自問)에는 도무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질 못합니다. 하물며 어릴 적 자그마한 도화지에 담아내려던 그 소박한 가치마저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말입니다.


‘"에어컨도 끊고 평생 6억 모았는데"…’

이웃 섬나라의 한 60대 남성이 평생을 간직해 온 자신의 가치를 뒤늦게 후회한 사연이 있다는 기사에 그만 이 사람의 자화상(自畵像)까지 들여다보고 말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이를 악물고 ‘돈’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악착같이 모아왔지만, 정작 부인이 덜컥 세상을 떠나고 나니, 자산(資産) 만들기에 치중해 왔던 자기 삶이 그릇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그저 일개 필부(匹夫)의 이야기가 아니더냐고 흘려버리기에는 그동안 살아온 이력(履歷)이 자꾸만 뒷덜미를 묵직하게 잡아끄는 것만 같습니다.



관련 기사 : 평생 아껴 6억 모았는데… 아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 조선일보 (2025.09.29.)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topic/2025/09/28/MRO52QIIKZA4FFIDDX32M7MW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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