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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항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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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Jan 30. 2023

바다에서 표류하다,
첫 번째 이야기

두 달간의 바다 표류기

혹시 만화책 중에서 'XX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를 아시나요?

사막, 정글, 바다 등등 여러 곳에서 주인공이 탈출하는 모습을 그린 만화책인데 저는 학창 시절에 재미있게 본 책입니다. 그 시리즈에서만 나올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2개월간의 바다 위에서의 표류기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 - 2016년 어느 날


때는 2016년 싱가포르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배에 3기사로 승선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정확히 어떤 항구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중국의 어느 한 항구를 떠나 싱가포르로 향하는 항로였었다. 하루, 이틀 정도만 더 항해하면 싱가포르에 도착이었다. 이번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Bunkering* 작업이 없어서 상륙을 갈 수 있었기에 싱가포르에서 뭘 하고 놀까 하고 들떠있었는데 그때 기관실로 전화가 한통 울렸다.


그 전화를 받는 기관장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치가 빠른 나는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해상 날씨가 안 좋아서 하루 정도 딜레이 되려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장 보관 중이던 Bilge*를 전량 배출하라고 했다. 아니 2~3일 정도 전에 다 배출하여 본선에 보관하고 있는 Bilge의 양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 밤에 도대체 왜 그 작업을 해야 하나 이해가 되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았다.


기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배가 곧 항해를 멈추고 무기한 대기를 할 예정이기에 혹시 몰라 최대한 비울 수 있는 것은 비우자고 하셨던 것이었다.


상선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당시 내가 승선하고 있던 컨테이너 선은 Weekly service가 기본이었다. 예를 들어 42일 Service라면 그 항로에 6척을 투입하여 7일마다 한 척씩 배가 그 항구에 들어가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하루만 일정이 늦어진다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장기 대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기관장님께서 덧붙이는 말을 듣고 보니 우리보다 1주일 먼저 싱가포르에 입항한 배가 억류되었다고 했다. 우리 배도 뒤따라 들어가면 바로 억류될 것이 뻔하기에 싱가포르 외항에서 무기한 대기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억류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배에 승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인수인계받은 일들에 적응하고 있던 참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 상륙에 대한 내 꿈은 전부 없어지고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법정관리 - 장기 대기의 시작


그다음 날 아침, 본선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선장, 기관장부터 실습생들까지 스물몇 명의 본선 모든 선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무슨 상황인지 너무나 궁금해했고 선장님께서는 무겁게 입을 여셨다.


"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지금 전 세계 여러 항구에서 우리 회사 배에 대해서 선박 억류 및 입항 거부가 일어나는 상황이다. 일단 회사에서는 우리 배에 투묘 후 장기대기를 지시했다."


선장님의 말은 놀라웠다. 그 당시 내가 속해 있던 회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선사였으며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사였다. 그랬기에 법정관리라는 말은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본선 선원들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선장님의 말대로 장기 앵커링*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갔고 선원 개개인은 현상 파악을 위해서 갈매기 통신*으로 연락을 해나갔다.


그렇게 그곳에서 장기간 앵커링을 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던 걸로 기억한다. 회사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 건지, 항해는 언제 다시 시작되는 건지, 회사가 망한다면 급여나 퇴직금은 받을 수 있는 건지, 새로운 회사를 찾아봐야 하는지 이런 먼 문제부터 시작해서 당장 식수가 얼마나 있는지, 식량은 며칠 분이 남아 있는지 이런 급한 문제까지 불거지며 정말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도 미래에 대해 두려울 텐데 바다 위 멈춰 있는 배 안에서의 법정관리는 정말 하루하루 사람들의 피를 말려갔다.


지금은 선내에서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인터넷이 사용 가능해서 카카오톡이나 영상통화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배에서는 통신 수단이 위성전화와 메일 이렇게 두 가지밖에 없었는데 위성전화는 상당히 비쌌기에 선원들은 거의 메일로만 소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선원들은 각자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우리 회사 상황에 대한 뉴스들을 최대한 텍스트로 보내달라고 하여 공유하며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메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었기에 우리 배는 계속 그 자리에서 앵커링을 하라는 회사 지시 몰래 앵커를 뽑아 핸드폰 로밍이 가능한 육지 쪽으로 자리를 이동하려고 시도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2016.09.06 KBS 뉴스



Bunkering - 벙커링 : 배의 연료를 공급받는 작업으로 배의 크기에 따라 그 양이 다르지만 몇백에서 몇천 톤 정도 수급받기에 통상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편이다.

Bilge - 빌지 : 배 밑바닥에 고이는 더러운 물, 기관실 내부 각종 펌프의 누설이나 기온차로 인해 생기며 며칠 분을 탱크 내에 보관해 두었다가 유수분리기를 통해 대양으로 배출하게 된다.

갈매기 통신 : 선원들끼리 주고받는 연락을 지칭하는 은어

Anchoring - 앵커링 : 투묘 후 장기대기를 뜻하며 배 앞에 달린 ⚓ Anchor(앵커)를 던져 바닥에 고정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해상에서 그 자리에서 대기하기 위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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