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eci Cela Feb 26. 2021

[그림책읽기] 첫 번째_ 달님 안녕

까꿍놀이, 단순하고 아름다운 놀이에 담긴 의미


[달님 안녕] 하야시 아키코 글/그림



30년의 세월이 증명한 그림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대표작 <상실의 시대_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의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는 굉장한 독서가로 묘사됩니다. 그는 죽은 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죠. 심지어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아.”

   이런 생각으로 그림책을 고르는 분이 계시다면, 하야시 아키코의 <달님 안녕>을 추천해 드립니다. (엄밀히 말해 <달님 안녕>은 작가가 죽은 지 30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출간되어 나온 지 30년은 훌쩍 넘었습니다)

   <달님 안녕>은 우리나라에 1990년경 번역되어 나온 이래, 지금까지 늘 판매 순위 상위권에 드는 그림책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50쇄를 넘겼을 거예요. 얼핏 보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이 책이 왜 인기가 있을까요? 아이들은 대체 왜 이 책을 좋아할까요? (한편으론 저는 왜 이 책을 4번이나 샀던 걸까요?)




까꿍놀이, 존재의 영원함을 갈망하는 원초적 놀이

   아이를 키워보든, 그렇지 않든 돌 전후의 아기를 향해서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까꿍”이 아닐까 합니다. 아기를 달랠 때에도, 놀아줄 때에도 이 단어는 빠지지 않죠. 사실 까꿍놀이는 아기에게 대상의 영속성을 알려주려는 심오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 지내던 아기로서는 대상과 떨어져 본 경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와는 늘 연결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던 것이 탯줄을 끊고(정확히는 끊임을 당하고!)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두려운데, 태어나보니 엄마가 있다 없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게 생각해보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겠어요? 아기 입장에서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엄마밖에 없는데! (사실 아빠도 이때만큼은 아웃 오브 안중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저귀 가지러 간다고 안 보이고, 분유 제조하러 간다고 안보이고… 그러니 자연히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요. 까꿍놀이는 바로 이 무서움, 두려움, 막연함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고 훈련시켜 줍니다. “엄마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야”라는 메시지를 손쉽게 전달해 줄 수 있지요.

   아기들은 생후 6개월 무렵, 까꿍놀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10개월 정도 되면 까꿍놀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고요, 심지어 자기 얼굴을 조막만 한 손으로 가렸다 보였다를 반복하면서 셀프 까꿍놀이를 즐기기도 합니다. “내가 아는 존재와 대상은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아. 내가 조금만 인내하면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어. 그러니 울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자”라는 상황 인식을 까꿍놀이를 통해 체득하는 거죠. <달님 안녕>은 이러한 까꿍놀이를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책입니다.  




구름 아저씨의 정체는?

   자세히 읽어보면, 이 책의 주인공은 달님이 아니라 고양이들입니다. 깜깜한 하늘, 지붕 위로 올라간 고양이 두 마리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환하게 떠오르는 달님을 보며 인사를 건넵니다. 그런데 즐거움도 잠시, 어디선가 구름 아저씨가 나타나 달님을 가려 버립니다. 두 마리 고양이는 구름 아저씨 더러 어서 꺼지라고 난리를 칩니다. 머쓱해진 구름 아저씨가 사과를 하고 황급히 사라지고, 달님은 다시 환하게 웃으면서 등장하지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 달님은 성별이 확실하게 나오지 않는데, 구름은 왜 아저씨로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달님을 바라보는 지붕 위의 고양이보다 땅 위의 엄마와 아이에게 시선이 쏠립니다. 15페이지 동안 한 번도 등장 안 한 엄마와 아기가 마지막 페이지에 짜잔~ 나타나는 겁니다.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겠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집 바깥에서 달님(주연), 구름 아저씨(악역), 고양이(관객)가 각각 열연하는 동안 집 안에서는 엄마(주연), 어떤 방해물(악역), 아기(관객)가 한 편의 까꿍놀이 상황극을 펼치고 있었구나 말이죠. 그럼 한 번도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서 악역을 맡은 소위, 집 안의 구름 아저씨는 누구였을까요?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해서 그 악역을 아빠라고 할 수도 있고, 엄마가 워킹맘이라면 갑자기 회사에서 날아온 업무 메일일 수도 있어요. 결국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구름 아저씨의 정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네요.




타자 앞에서

   까꿍놀이 말고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아요. 바로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서서히 엄마, 아빠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그 대상에게 아기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울거나, 웃거나. 상반되는 두 행위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인류학자들은 아기가, 넓게 말해서 모든 동물의 새끼가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랍니다. 지금도 새끼를 잠재적 경쟁자로 보고 죽이는 일부 동물들이 있습니다. 사자가 대표적입니다. 다른 수컷의 새끼를 죽이는 포악한 사자의 모습을 종종 봅니다. (라이온킹, 다들 보셨죠?) 사실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렵지만, 원시 인류는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와 관계없는 아기를 그저 식량을 두고 경쟁을 펼쳐야 하는 잠재적인 적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따라서 아기가 생글생글 웃으며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스스로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진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는 행위는 스스로 살기 위한 행위가 아닌, 나 좀 살려 주세요! 를 내포한 행위로 볼 수 있겠지요. “내 선에선 어찌할 수가 없으니, 아빠든, 엄마든 나타나서 나 좀 구해주세요!” 하는 강렬하면서도 수동적인 의사 표현입니다.

   결국 <달님 안녕>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게 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웃으며 다가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Hello, Stranger! 내가 귀엽게 웃으며 다가가 인사할 테니, 나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말입니다!

   까꿍 놀이를 통해서 대상의 영속성을 깨달은 아기는 점점 성장함에 따라 더 커다란 벽과 마주하게 되지요. 바로 ‘죽음’입니다. 이제 아이는 세상 그 무엇도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이에게 영원한 부재의 단계를 곧바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존재의 사라짐이 조금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상황을 활용한 놀이를 완충재로 쓰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숨바꼭질>의 기원을 여기서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번에는 앤서니 브라운의 <숨바꼭질>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까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