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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Apr 11. 2024

취향에 관하여

완벽한 취향 존중은 가능한 것일까?

  자의식 정점의 고등학교 시절, 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음악 취향을 가졌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초에 ‘서태지’라는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음악 취향은 비틀즈, 오아시스, U2, 넥스트, 스매싱 펌킨스, 트래비스 등 무수히 많은 밴드들로 가지를 뻗어 나갔고, 그것이 평생의 감수성을 형성하는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그런 내게 ‘시시한’ 대중가요에 열광하는 친구들은 하나 같이 ‘진짜 음악’을 듣는 귀가 없는 우매한 대중들이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실컷 비웃고 멸시했었다. 

  당시엔 평범한 취향을 가진 것만큼 한심한 게 또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사춘기 때나 할 법한 하찮은 생각이지만, 친구도 없고 음침한 나 같은 녀석들은 적어도 취향에 대한 유별난 자부심이라도 있어야 나를 둘러싼 바보들을 비웃으며 감옥 같은 학교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사실 락(Rock) 음악을 즐겨 듣는 것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돌 음악과 댄스, 힙합, 트로트 등 다른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을 무작정 무시하지는 않게 되었다. 일단 ‘K-Pop’이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음악만 놓고 봐도 세계 시장의 정상에 오를 만큼 질적 향상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옛날처럼 무턱대고 아이돌 음악 수준이 저급하다고 논했다간 ‘음알못’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타인의 취향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내게도 ‘취향 존중’이라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영화에 관한 비평(을 가장한 비난)을 접하다 보면 종종 몹시 극단적인 반응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딴 쓰레기 영화에 열광하는 놈들은 영화 볼 줄 모르는 거다’, 혹은 반대로 ‘수준 떨어지는 관객들은 이 영화의 진가를 모를 거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논쟁은 결코 생산적으로 끝맺는 경우가 없다. 감정적인 댓글로 서로 뒤엉켜 싸우다가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지는 것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그 대상이 영화든 사람이든 티끌만큼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라도 있으면 영혼까지 파괴할 기세로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이 어느새 대국민 E-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같은 평가를 즐기는 이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특정 대상을 까내림으로써 자신이 그 대상 혹은 그것을 좋아하는 이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절로 획득하게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모 연예인의 외모를 지적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게 되는 걸까? 영화 <기생충>의 완성도를 나무란다고 해서 그가 봉준호보다 뛰어난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다. 어떤 대상을 극단적이고 감정적으로 비난할수록 그 대상이 아니라 본인 꼴이 초라하고 우스워진다.

  온라인 무면허 비평가들이 서로의 안목을 자랑하며 겨루는 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중고등학생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댓글을 남기며 씩씩대고 있을 그들이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스스로의 취향에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는 건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즐길 줄 아는 나’, ‘진정 좋은 것을 알아볼 줄 아는 나’를 인식하는 것 역시 어떤 취향이나 취미를 향유하는 즐거움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만이 유일하고 우월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곤란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여전히 내 취향이 자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경한 장르의 음악과 영화를 향유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는 게 좋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티를 내거나,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려 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 수준은 오래전에 졸업했으니까.


  완벽한 취향 존중이라는 게 가능할까? 존중은 이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지만, 타인의 취향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즐겨 들은 적 없는 트로트를 갑자기 사랑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타인의 취향을 진심으로 존중하려면 억지로 그것과 가까워지려 하거나 좋아하는 척하지 말고, 오히려 적당히 무심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실에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보는 아버지에게 기어코 서태지 6집 앨범의 진가를 알려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간 서로의 삶이 피곤해진다. ‘아버지는 트로트가 좋으신가 보다.’ 거기서 끝. 그 이상의 노력은 굳이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 너는 너’로부터 시작되는 취향 존중은 평화와 화합으로 가는 길이다. 모두들 타인의 취향에 적당히 무심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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