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랑하는 것인지, 책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먼 거리를 이동할 때면 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자가용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운전하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동 거리가 길어지면 자연스레 책을 꺼낸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죽은 눈으로 고개를 꺾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일주일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다. 그렇게 스마트폰 삼매경인 사람들 속에서 혼자 은밀한 지적 우월감을 느낀다. 마치 닭 무리에 섞인 한 마리 두루미가 된 심정으로. 누구도 그런 내게 관심을 주지 않지만, 그저 나 홀로 오만하고 음침한 만족감을 즐기는 것이다.
책 읽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슨하지만 따뜻한 연대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몇 년 전 태국 치앙마이에서 약 2주 간 머물렀을 때였다. 치앙마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였기에 여행책에 소개된 웬만한 곳들은 다 가 봤고, 좋았던 공간을 재차 찾아가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아늑한 분위기의 어느 카페를 자주 찾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차 한 잔과 함께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문득 내 옆에서 아내로 짐작되는 분과 한참 대화를 나누고서 일어나던 중년의 외국 남성이 내게 한마디 말을 건넸다. “책 읽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네요.” 나는 그 말이 놀랍기도, 또 쑥스럽기도 해서 연신 ‘땡큐’만 연발했었다. 뭐가 그리 고마웠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퇴근 후 학원 강의실에 조금 일찍 도착해 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 창밖에서 그 모습을 발견한 원어민 선생님 ‘제프’가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달려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제프와 나는 평소 책과 명상,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했기에, 그 환한 표정이 인기척 없던 전장의 숲속에서 전우를 만났을 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지...?’ 순간 고민에 빠졌던 것만큼이나, 독서 동지를 만난 반가움을 숨기지 않는 그의 맑은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헤르만 헤세’는 ‘헐만 헤스’로 발음한다고 알려준 것도 제프였다.)
책과 친한 사람을 찾기가 좀처럼 어려운 시대인 만큼,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의 연대감이 더욱 또렷해지는 듯하다. 또 그만큼 내가 특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자의식이 점점 몸을 불려 간다. 그러다 보니 정작 책 속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보다, 책을 읽는 나, 그리고 혹시 이런 나를 주목하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쓰는 에너지가 더 큰 것 같다.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겨 버린 인류가 점점 멍청이로 전락하는 가운데, 고고하게 책을 읽음으로써 그 흐름에 저항하는 기분이랄까.
다만 문제는 그런 단순한 착각에서 끝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 스마트폰을 보는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그들을 혐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동영상을 보느라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 줄도 모르고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 이를 보며 혀를 차고, 메시지에 답장하느라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앞을 가로막는 이를 밀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친구나 연인,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스몸비’(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라고 부른다는데, 나는 차라리 그들을 ‘폰청이’(스마트폰과 멍청이의 합성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책을 사랑하는,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하는 나로서도 스스로가 그저 책밖에 모르는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남들과 비교해 뚜렷한 굴곡이랄 게 없는, 유독 평범하고 모험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자격지심을 안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 같다. 때문에 지인들의 고된 현장 업무나 여행 이야기, 흥미진진한 실패와 성공담을 접할 때면 괜스레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도전해 보지 못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향한 질투심에 울적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고작 책에 틀어박혀 타인의 지식과 경험, 허구의 세계를 탐닉하는 것 따위에 시간을 쏟으며 우쭐했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진다.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건 그들이고, 난 그저 글 속에 파묻힌 바보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시리게 자각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온라인으로 타인과 연결되는 데 부단한 의식을 쏟는 행위를, 내가 그토록 싸우기를 유예한 현실의 진창에서 몸부림치다 지쳐 텍스트를 해석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을 그동안 너무 모진 시선으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 앞길을 가로막는 무수한 ‘폰청이’들을 조금은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