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 퇴로를 차단한다.
매번 작품 촬영을 한 달쯤 앞뒀을 때 커다란 심리적 위기가 찾아온다. 스태프도 꾸려지고, 배우 캐스팅도 완료되고, 로케이션 헌팅도 순조롭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갑자기 배우 스케줄이 틀어지면 어떡하지?’, ‘로케이션이 펑크 나면 어떡하지?’, ‘촬영일에 비가 오면 어떡하지?’, ‘아무튼... 뭔가 잘못되면 그땐 어떡하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쓰나미가 되어 머릿속을 휘젓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꿈’을 꾼다. 콘티 없이 현장에 던져진 채 촬영을 진행하는 꿈이다. 차라리 발가벗고 도심 한가운데 떨어지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이런 소리가 튀어나온다. “와, 꿈이라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아홉 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니, 그 꿈을 적어도 아홉 번 이상 꾼 셈이다. 이 정도 했으면 조금은 담력이 생길 만도 한데, 영화를 만들 때마다 불안하고 메스꺼운 기분이 찾아오는 걸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영화계 거장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스티븐 스필버그는 스탠리 큐브릭과의 대담 중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싫은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릴 때.”
수백 명의 스태프와 출연진들이 오직 자신만을 기다리는 현장에 이르는 과정이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촬영을 앞두고 느끼는 부담감과 두려움의 크기는 나 같은 병아리나 스필버그 같은 영화의 신적 존재에게도 비슷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화를 찍든, 아무리 큰 예산의 작품을 만들든 나는 이 울렁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다.
언제부터인가 내겐 스스로가 어떤 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도록 밑밥을 먼저 까는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면 촬영 예정일이 반년은 더 남았는데도 배우님께 시나리오 초고를 투척한다던지, 이번 시나리오가 몹시 재밌다고 허풍을 떨고 다녀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놈이 조만간 영화를 찍을 생각이군’ 하고 각인을 새겨 버린다던지. 그렇게 말을 던져 버린 이상 영화는 찍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섣불리 발행해 버린 약속을 거두는 대신, 그저 영화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불타는 열정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아서 그나마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의지로 코앞의 과업을 해결해야 하는 내게, 이 방법은 나를 달아날 수 없게 만드는 철조망 역할을 한다.
몇 년 전 학교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급식실을 배경으로 유혈이 낭자하는 액션 신을 찍기 위해 소품용 나무젓가락을 은색으로 칠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늦은 저녁, 한 스태프의 집에 모여든 연출부와 제작부가 사이좋게 둘러앉아 나무젓가락을 쇠젓가락으로 만드는 마법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는 그만 덜컥 겁이 나고 말았다. 내가 별생각 없이 시나리오에 끄적인 한 줄의 설정을 영화로 구현하겠다고 다들 저 고생을 하고 있다니. 그때 느꼈던 아득한 부담감, 그리고 뭔가 무책임한 짓을 해버렸다는 죄책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준비한 졸업 작품도 촬영 나흘 전까지 메인 로케이션이 구해지지 않는 등 암담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지만, 그럴 때면 나무젓가락에 은색 락카를 칠하던 제작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 수고와 고생스러움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끝까지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순전히 영화에 대한 열정과 집념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서 걱정과 불안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단단한 마음. 하지만 실제로 내 몸을 작동시키는 힘은 내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이를 좋게 말해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아홉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배운 게 없지는 않다. 그중에서도 위기의 순간이면 항상 중얼거리는 주문 같은 교훈 두 가지가 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영화는 어떻게든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하더라도 거의 무조건적인 확률로 무슨 일이 생긴다. 경험상 이는 어떤 현장이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하지만 패닉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 일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당장 촬영을 해야 하는데 중요 소품을 빼먹었다? 제작부가 다이소로 달려가 비슷한 물건을 사 오면 된다. 갑자기 비가 와서 예정된 스케줄에 촬영을 못 한다? 날 좋을 때 최소 인원으로 보충 촬영을 하면 된다. 배우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탔다? 이번 기회에 은근히 연기 욕심이 있던 연출부 친구를 데뷔시키면 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위기 대처 능력은 상상 이상이다.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을 땐 그것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야말로 ‘어떻게든’ 수습이 된다. 그리고 의외로 그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일 역시 잘 없다.
소품을 빼먹는 건 실수에 불과하고, 궂은 날씨는 제 아무리 용을 써도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라진 배우를 소환하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그저 그 일이 일어났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실수를 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주의하면 될 일이다. 다만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으로 준비하는 것이 내 역할의 전부다.
그렇게 모든 촬영이 끝난 뒤 돌아보면, 이미 소멸해 버린 사건사고의 소용돌이는 스태프들에게 몇 년 후에도 우려먹을 수 있는 안주거리가 된다. 대부분의 영화는 지금도 그렇게 어떻게든 만들어지고 있다.
만에 하나 영화가 엎어지는 최악의 사태가 생긴대도 그것으로 삶이 끝나지는 않는다. 물론 감독에겐 영화에 가졌던 애정에 비례하는 고통이 찾아올 테지만. 실제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던 지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담배 한 대 물고서 그 일을 웃으며 추억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매번 기도하지만.)
벌써 촬영을 마친 지도 오래인 내 최근 작품의 제작 과정을 문득 돌아본다. 궂은 날씨, 로케이션 협의 불발, 배우의 스케줄 변동, 예상치 못한 제작비 상승 등 다시 생각해도 아찔해지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던 거지. 영화는 어떻게든 만들어질 거야’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실제 이상으로 몸을 부풀려 나를 쥐고 흔드는 일은 없다.
아마도 나는 계속 지금처럼 영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먼저 밑밥을 깔아서 스스로의 퇴로를 막고, 그로 인해 생긴 책임감으로 뒷일을 수습하고, 어차피 일어날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또 한 작품의 매듭을 지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오랜 숙적 울렁증과도 조금씩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먼 훗날 촬영을 앞두고도 울렁증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이상 영화가 내게 큰 모험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