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이 일곱 살
처음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아니 임신과 동시에 모성애라는 것이 저절로 생기는 건 줄 알았다. 티브이에 나오는 엄마 파워나 엄마니까 같은 것들이 전부 저절로 어떻게든 아니 너무 당연하게 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아니었다.
나는 임신부터 순탄치 못했다. 두 번의 유산으로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나에게 의사는 포기하라는 말을 할 만큼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정말 기적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임신 초기에는 차 타면 멀미를 심하게 한다는 것 말고는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 없었다. 또다시 허망하게 아이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배가 콕콕 쑤시는 것 같으면 하던 일을 그냥 다 멈추고 누워있을 수 있었다. 그땐 집안일이 조금 밀려도 내가 밥을 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컨디션만 신경 쓰면 되었다.
남들은 안정기에 든다는 그 시기부터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붉은 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참기 힘든 건 간지러움이었다. 온몸이 간지러워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고 온몸이 퉁퉁 부어서 아침이 되면 누가 나를 때린 것처럼 여기저기 붉은 멍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병원에 가도 방법이 없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 무사히 출산하는 방법뿐이었다. 남들은 임신하면 먹고 싶은걸 다 먹는다고 하지만 나는 이 간지러움 때문에 면역력에 좋다는 버섯에 된장찌개를 주로 먹었다. 외식을 하고 나면 더 심해지는 간지러움에 외식도 어려웠다.
그렇게 간지러움과 싸우며 출산을 하였다. 출산하고 나니 정말 거짓말처럼 피부에 올라오던 붉은 기들과 간지러움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육아가 시작되었다. 나는 15개월까지 완모를 했다. 여기서 완모는 완전한 모유수유를 말한다. 젖이 돌지 않아 걱정하진 않았다. 누구보다 젖이 잘 나왔다. 하지만 수유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 거다. 모유수유는 젖이 너무 잘 나와도 문제다. 나는 젖이 잘 나오는데 아이가 먹지 않으면 젖몸살을 경험해야 한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다. 젖이 공급이고 아이가 먹는 양이 수요라고 치면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가 없어서 엄마 몸이 아픈 거다. 아이가 안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가 먹는 양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아이와 수요와 공급의 박자를 맞춰가는 것으로 몇 번은 울어야 했다.
수유에 익숙해지고 나면 이제 잠을 못 자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된다. 예민한 아이 같은 경우 새벽에 3-4번 깨는 건 일도 아니다. 나 같은 경우 한번 잠이 깨면 잠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30분씩 쪽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울증이 나를 집어삼켰다. 우울증이 무서운 건 내가 우울증이라는 걸 모른다는 거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내가 우울증이었구나 알게 된다.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좋게 들리지 않는다. 온통 부정적으로만 들리고 내가 알아서 할 건데 간섭한다며 나도 싫은 소리만 내뱉게 된다. 놀랍게도 연애로 결혼한 신랑과 그때까지 단 한 번의 싸움도 하지 않았던 나는 이때 처음으로 신랑과 큰소리를 내며 싸웠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겼다.
한 번은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다 입원했는데도 떨어지지 않는 열에 밤을 새우며 아이 곁을 지켰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고 치료도 잘 받아 며칠 후 퇴원했지만 순식간에 기도가 부어서 막히는 크룹이라는 응급상황으로 며칠 뒤 또다시 응급실에 가야 했다. 그렇게 또 며칠을 밤을 새우고 아이가 괜찮아질 때까지 신랑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엄마 나이 일곱 살이 되기까지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경험하면서 나는 엄마가 되었다. 모성애나 엄마니까 가능한 일은 사실은 내가 경험하면서 생기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임신과 동시에 당연히 생기는 줄 알았던 모성애는 사실은 임신하여 아이를 내 뱃속에 품으면서 아이를 생각하며 천천히 생겨나는 것이었고 엄마 파워 엄마니까 가능한 그런 일든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는 걸 엄마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울증도 경험하고 아이를 안고 응급실을 뛰어다니며 열 나는 아이 옆에서 밤새워 기도하며 서서히 엄마니까 가능한 일들이 생겨난다는 걸 엄마 나이 일곱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며 나를 보고 웃는 그 순간 엄마는 벅찬 감동으로 그동안 육아하며 힘들었던 감정들을 이겨내고 "엄마"하고 나를 향해 정확하게 말했던 그 순간의 감동으로 또 한 번 그래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며 위로받고 안심하게 된다. 어린이집에서 재롱 잔치할 때도 내 아이가 이렇게 자라주었구나 이렇게 컸구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눈물을 훔쳤다. 엄마가 되면 눈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원래도 눈물이 많은 나는 아이에 일에 있어선 한없이 수도꼭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이젠 어떤 일에도 눈물은커녕 아예 감정의 변화조차 없는듯한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일은 그냥 물 흐르는듯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별 반응 없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의 엄마 나이는 마흔이 넘었다. 오로지 나의 엄마가 아니라 우리 오 남매의 엄마이니 이제 겨우 일곱 살인 나의 엄마 나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감정들이 쌓여버린 엄마 나이를 과연 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우리 오 남매는 어려서부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앞서 잠깐 얘기했지만 나 같은 경우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 오 남매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만 아파도 엄마는 다섯 번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 그냥 병간호만 따져도 이런데 우리가 독립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그걸 다 버텨 낸 엄마는 어땠을까. 나처럼 눈물이 많았다면 그 많은 눈물을 흘리고 흘리다 이제는 아예 말라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엄마는 우리가 모두 독립한 지금 인생에서 가장 고요한 시기를 보내고 계신 것이라 그래서 이제는 어떠한 일에도 감정의 변화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 이제 엄마는 조금 편안해지셨을까 엄마 나이는 이제 조금 천천히 늘게 되는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우리 오 남매를 키워낼 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급하게 먹은 나이가 체해서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나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분명 엄마도 나의 엄마인 건 처음이었을 텐데 엄마는 앞서 언니들을 키워내며 엄마가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는 나의 엄마로는 엄마가 처음이라 생각해서 엄마와 나의 박자가 맞지 않았던 것을 아니었을까 어쩌면 엄마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나와 맞춰가는 것보다 하루하루가 바빴던 엄마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엄마 나이 일곱 살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사정을 들여다보며 이해하고 노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