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윤제 Oct 14. 2023

《’뒤’를 보지 마시오》

한 음악가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사랑은 뱀에 물려 죽는다. 슬픔에 잠긴 그는 죽은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명계로 내려간다. 그리고 하데스를 만나 죽은 그녀를 풀어줄 것을 간청하며 그 앞에서 리라를 연주한다. 그 노래와 연주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지옥의 모든 형벌이 그 노래를 듣기 위해 잠시 멈춘다. 복수의 여신들의 눈에는 피가 아닌 눈물이 흐르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도 감동한다. 연주에 감명받은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음악가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간청한다. 하데스는 요구를 들어준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음악가는 지하세계에서 벗어나 지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로 뒤를 봐서는 안 된다. 고개를 돌려 그가 사랑하는 이를 절대로 봐서는 안 된다. ”뒤돌아보는 즉시 너는 네가 사랑하는 대상을 잃게 될 것이다(Quod amas, avertere, perdes).”


하지만 음악가는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뒤’를 본다. 금기를 어긴 그 순간, 사랑하는 이는 죽음의 비탈길로 미끄러진다.


음악가의 이름은 오르페우스다.


오르페우스는 왜 고개를 돌렸을까? 그는 왜 금기를 어겨 에우리디케를 다시 죽게 만들었을까? 결국, 그가 ‘뒤’를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는 죽음의 세계에 도달한다. 하데스의 통치권에 제 스스로 들어간 셈이다. 그리스인들에게 ‘하데스’란 ‘안(Ha-) 보이는(idein) 세계’를 의미한다. 죽음 이후 보이지 않게 된 혼백들이 가는 곳은 스틱스 강 너머 ‘하데스’의 세계다. 그는 보이지 않게 된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스스로 들어간다.


“인간은 죽음을 위해 태어났다(Morti natus est)”는 소 세네카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얻는 하루는, 삶의 줄어드는 하루이기 때문이다”라는 페소아의 말처럼, 인간에게 죽음은 삶에서 출발하는 일방통행로의 종착지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오르페우스에게 죽음(‘보이지 않음’ 혹은 ‘보이지 않게 됨’)은 그의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


생리적으로 인간의 시선 ‘뒤’에 있는 것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뒤’를 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시도가 된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아 뒤를 본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aphantos)”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프시케의 이야기가 관통한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경고한다. “남편의 얼굴에 관해(de forma mariti) 알려고 하지 마시오.” 하지만 프시케는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자신을 포옹하는 남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남편의 침대에서 소리 없이 기름 등잔을 들이민다.”


등잔의 기름이 에로스의 어깨에 떨어져 자국을 남긴다. 그는 즉시 새가 되어 떠난다. 교훈은 자명하다. 사랑은 상을 왜곡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영속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장님이 되어야 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보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사랑의 주문은 풀려버린다.


다른 한편으로, 오르페우스가 고개를 돌린 이유는 그가 음악가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하데스)의 세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죽음(하데스)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한 번 울린 음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소멸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된다’. 두 번째로 가청적인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사르트르는 음악을 이렇게 서술한다. “음악의 곡조들만이 죽음을 자신 안에 내적 필연성으로 오연하게 품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음악]은 쉴 줄을 모른다. 어떤 완고한 질서가 그것들을—자신을 돌아볼 틈을, 자신을 위해 존재할 틈을 주지 않고서— 태어나게 하고 또 파괴해나간다. 그것들은 달리고, 서두르고, 그렇게 지나가면서 나를 딱, 딱 치고, 그러고는 없어져 버린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고 싶지만, 만일 그들 중 하나를 멈춰 세우게 된다면, 내 손가락 사이에 너절하고도 따분한 하나의 음만이 남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난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는 이 죽음을 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뒤돌아 본다(Flexit Orpheus).”


孫潤祭, 2023. 10. 14.

작가의 이전글 《사냥으로서의 음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