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는 이전의 후회가 되었던 그런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면 전의 경험을 상기시키며 의지를 가지고 반대의 선택을 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드라마 같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정말 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그저 행동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성공하기도 하였고 어떤 날은 또 후회가 되는 선택이 반복되기도 했죠. 후자의 선택이 있을 땐 다시 검은 것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변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불신이 번지기도 하죠. 그럴 때면 두 눈을 다시 꼭 감고 양손을 불끈 쥔 채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과 함께요.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구나.' 외면하고, 포기하고, 부정을 일삼던 내가 바라보고, 도전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합니다. 근래에 읽고 있는 <철학 에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어느 부분에서 철학적 '내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변화의 근본 원인이고 사물 내부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변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책의 이야기를 좀 더 인용하겠습니다.
'공부를 하게 하는 힘은, 상대방을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입니다. 이처럼 상호 대립(대립이라는 말이 반드시 적대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하는 두 사물이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것을 상호 의존 관계라고 말합니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입니다. 즉 모순이란 한편으로는 상호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입니다. 앞서 예로 들었듯이 경제에 문외한이던 사람이 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은 경제학을 공부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여기서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투쟁입니다. 결국 변화는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즉 대립물의 투쟁이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중략...] 이럼 점은 꽃나무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꽃나무의 씨앗을 땅에 심으면 꽃나무로 변화합니다. 이 변화도 씨앗 내부에 씨앗이 아닐 가능성, 즉 꽃나무로 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즉 씨앗은 씨앗이면서 동시에 씨앗이 아닐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씨앗은 이러한 두 대립물의 통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의 내적 모순이며, 이러한 내적 모순의 두 대립물이 투쟁함으로써 씨앗은 나무로 변화합니다.' 저자 조성오, <철학 에세이>, 출판사 동녘, 출판연도 개정 4판 2023년 8월 25일, 인용한 페이지 82-84.'
이처럼 제가 겪은 변화에 대한 고민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변화할 가능성과 변화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내적 모순이 생겼으며, 투쟁한 것입니다. <철학 에세이>를 읽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개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치에 맞게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 투쟁을 통하여 일렁이는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고 '나'라는 사람이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절이 서툴렀던 저는 상황에 맞는 거절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나'인 주체로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싫어하는 것은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고민한 뒤 더 좋아해도 되겠다 혹은 더 싫어해도 되겠다 정도였습니다. 겸손을 크게 미덕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겸손한 마음과 행동이 발현되었습니다. 진심에서 비롯된 겸손함이었습니다. 나의 주제를 잘 파악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게 되니 남을 존중하게 되는 뭐 그런 순환구조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텅텅 비어있을 땐 허망된 큰 꿈을 많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나의 현재를 탈피하기 위해 합리화하는 것이죠. 하지만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진실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저와는 다른 성향과 사고를 가진 사람 또한 크게 존중합니다. 그저 '나'는 '나'인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가지의 영화 중에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극 중 여주인공이 묻습니다. "넌 네가 뭐가 될지 꿈도 안 꿔 보니?" 그리고 대답합니다. "뭐가 되냐고? 나는 내가 되는 거 아냐?"라고요. 우리는 어쩌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