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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겨울, 애 16화

여행의 종착역

by 김민석

“아궁이를 피우는 집은 낯설죠?”라며 조금은 머쓱한 어투로 건넨 그의 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겨우 그 한 문장에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출발하기 전 날부터의 일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이번엔 그의 상태를 살피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한참을 쏟아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침도 좀 흘렸던 것 같고 그에게 튀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얼굴과 몸에 조금 오른 것 같다고도 느꼈는데 그것은 어쩌면 ‘아궁이’가 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열을 올리며 그에게 토해낸 나의 이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모든 서사가 끝나고 연극의 커튼이 내려갈 때까지의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런 뒤의 나는 그 연극에서 최선을 다한 배우 마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 있었다. 호흡도 깨나 거친 느낌이었고 얼굴과 몸에서 일어나던 열은 정도는 미세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더욱 올라 있었다. 그 때문에 방의 온도도 물론 높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인지한 뒤 에서야 나는 덜컥 사과를 건네었고 양회복은 적지 않은 시간을 침묵했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강한 바람이 문을 뒤흔든 다음이었다. 양회복은 자신의 경험과는 거리가 먼 일 들이라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동수 씨는 참 저와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저는 도시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절절한 사랑도 해보지 못했어요. 유행하는 노래 가사나 영화 한 편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말 수도 적고 사교성이 그리 뛰어나지도 못하기에 주변에 사람을 여럿 두지도 못 해요. 그렇기 때문에 동수 씨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불편한 것에 거절도 잘하기에 머리 뒤통수에서 들리는 나쁜 말들도 여럿 들어봤습니다. 그런데요. 이상하게 동수 씨의 황당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네요. 이유가 있겠지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요. 사람 사는 거 그 거, 별 거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요. 오늘 하루 할 일 못 하면 올 한 해를 굶을 수도 있어요 저는. 딸기가요. 생각보다 아주 수고스러워요. 먹는 분들이 거기까지 생각해 달라는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냥 매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하면 되고요. 외로울 땐, 하나 있는 친구한테 전화해서 소주 병나발 들고 마시다 보면 그냥 잠에 들어요. 그리고요. 가끔 무언가가 부러우면요. 그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서도요. 잠깐 욕심도 가져봐요. 근데 그거 못 가진다고 울상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고요. 왜냐하면 그것이 제가 밥 벌어먹고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아니잖아요. 또, 가끔 떠난 가족이 그리우면요. 그냥 펑펑 울어버려요 저는. 그거 눈물 한 번 쏙 빼놓으면 적어도 수개월 모른 체로 또 지낼 수 있어요. 동수 씨. 있잖아요. 제가 동수 씨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요. 저렇게 지내다 보면 결국 또 따뜻한 계절이 오잖아요. 지금 너무 추운 이 겨울에 뭐가 씌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조금만 있으면 봄이에요. 뭐 봄이라고 겨울보다 낫고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요. 꽃도 피고 초록색 잎도 나고 보이면 그래도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아요? 뭐, 봄이 그저 그렇다면 또 여름 기다리고요. 여름도 아니면 가을 기다려요. 그리고 겨울이 다시 왔을 때 또 모르잖아요. 건너온 계절들 덕에 다음 겨울은 따뜻할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동수 씨, 저는요. 겨울이 와야만 해요. 딸기가 겨울이 제철이잖아요. 또 논산 딸기 하면 알아주고요. 저는 그렇게 살아가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저 문장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태어나고, 길러지고, 제안받고, 선택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좌절하고, 일어서고, 눈치 보고, 의지하고, 멀어지고, 버려지고, 또다시 사랑하고. 내가 왜 떠나 온 것인지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착각했던 그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그때. 나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떠났다. 모든 것을 비우고 떠났던 그 순간 시작된 나의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들여다보며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쉬운 인생을 살아가길 바랄수록 더욱 힘든 인생과 조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의 흐름에 멈춤은 없다. 내가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멈추지 않는다. 꽃이 피어나고 숲은 우거지며 색소가 분해된 잎은 뻘겋게 변한 뒤 떨어진다. 그리고 동면이 찾아오면 다음 꽃이 피어나기까지 잘 버틴다. 인생과 시간이라는 것은 순환하는 것. 끝은 동시에 새로운 시작. 거스를 수 없다. 우린 그저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러한 마음을 할머니가 보자기에 반찬 싸듯이 소중하게 마음에 간직했다. 그리고 나는 스친 인연들과 적절한 인사를 나눈 뒤 나의 일상으로 다시 회귀하였다. 시끌벅적한 회색 도시, 반복되는 하루, 이어졌다 붙여지는 인연들. 그리고 잘 간직한 마음속 보자기 하나. 그 보자기를 생각하면 하늘이 푸른 것도 살필 수 있었고, 주변을 둘러보며 계절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 풍경 속에 작은 꽃 하나 피어나고 있었다. 아주 노랗고 푸른 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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