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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영 Mar 14. 2022

행복을 주는 손주들


  냉장고에서 잠자던 사과, 배는 토끼, 호랑이, 사자가 되어 고 조그만 아이들의 입에 오물조물 잡아먹힌다.

 마루에 펼쳐진 넓은 상 위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고사리 손에서 눈사람도 만들어지고 물감을 색색으로 섞어 떡이나 케이크도 된다. 또는 귀가 찌그러진 말도 눈이 짝짝인 소도, 등짝에 얼룩이 있는 사슴인지, 기린이라기엔 목이 짧아 보이기도  하고, 얼룩소로 보기엔 덩치가 작아 보이는 것이 서있기도 한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욕조는 바닷물로 채워져 색종이 배가 떠다닌다. 어디서 들었는지 태평양 이란다. 파란 고래가 헤엄치고, 빨간 아기 상어가, 그리고 노란 물고기가 배에 올라타기도 한다.

 밤이 되면 어둑했던 마루의 천정에서는 별이 빤짝이고 달님이 웃는다. 

 집안 곳곳에서 침묵하던 고요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에 모두 모두 활기차게 깨어나 나비가 된 듯이 춤을 춘다. 덩달아 나도 훨훨 날아보려 한다.

 잠 잘 때가 되어 아이들 넷의 가운데에 누우면 으레껏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이정해진 순서이다. 그럴 때마다 손자의 주문은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다.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흥부와 놀부가 제일 재미있어요.”

 내가 하는 흥부네 박에서는 뽀로로도 나오고, 축구공도 나오며, 곰 인형도 나온다.    또한 놀부네 박에서는 귀신이, 마귀가, 뱀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다 나온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것은 다 흥부네 박에서, 싫어하는 것은 놀부네 박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귀에다 속삭인다. 이어서 백설 공주, 신데렐라에서 선화공주, 평강공주, 낙랑공주로 바뀐다. 그리고는 클레오파트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선덕여왕 등등의 이야기로 발전한다. 하나 둘씩 쌕쌕 잠자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를 마친다. 무슨 꿈을 꿀까? 그들의 꿈속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제각기 요구하는 메뉴가 다르다. 나는 요술쟁이가 되어 뚝딱 다 만들어 놓는다. 그러다보니 식탁위에는 나비가, 새가, 하트가, 그리고 잠자리가 앉아있기도 한다. 

 난리 법석을 떨던 아이들이 가고나면 다시 정막이 내려앉으며 깊은 산사에 머무는 것 같다. 온몸의 삭신이 쑤셔 널브러져도 세포는 생기를 찾은 듯하다.


 나에게는 모두 초, 중학생인 손자 하나와 손녀 셋이 있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데리고 있기를 좋아했다. 둘씩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또래 끼리 노는 것을 더 재미있어 했다. 

 그저 예쁘고 대견해 하는 할 애비, 할미의 마음을 알아버린 아이들은 제 집에선 못하는 것을 하고 싶어 요번에는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고 온다. 그러다 보니 온 집안은 어지러 지고 난장판이 되어도 즐겁기만 하다. 

 아이들이 오면 나는 마술사가 되어 ‘꿈의 궁전’을 만들고 그 안의 시녀가 된 착각에 빠진다. 그 안에서는 별나라에도 가 볼 수 있고, 달나라에도 가서 저벅저벅 거닐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주를 한 바퀴 돌아보고 와서 갖가지 이야기를 하며 반짝이는 눈망울 들을 본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의 상상 속에 있는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시녀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 만들어 바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도 몇 해가 지나니 아이들은 차츰 궁전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계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꼭 필요한 것이 없어도 문구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인가는 네 명을 데리고 가면서 “한 사람이 만원어치 까지만 사는 거다.”하고 정해주었다. 외손녀 둘은 만원을 채우느라 이것저것을 골라 계산하기에 바빴다. 만 원 이하로 할 때는 거의 없다. 

  친손자와 손녀는 천 원짜리 물방울을 하나씩 고르고 다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 마다 생각이 다른 것이 신기하다.

 외손녀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부터 올 때마다 나에게 동전 까지 여러 종류의 돈을 주면서 “내가 용돈을 모은 것이니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고 할머니가 쓰세요.” 하는 것이다. “왜? 할머니 돈 있어. 너 필요할 때 써야지.”

 “아니 예요. 나는 엄마한테 달라고 하면 되는데 할머니는 만원 밖에 없잖아요.”하며 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만 원 이상을 쓸 수 없는 할미가 불쌍해 보였는지 “내가 이다음에 이천만원 줄게.” 한다. 손녀에게는 최고의 금액인 이천만원을 기대해본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여드름이 얼굴을 덮은 사춘기가 되니 이천만원 소리도 하지를 않는다.

 손주들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는 할미의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그 손녀에게 

 “앞으로 십년 후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니?”라고 했더니 

“할머니,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내가 지금 무엇이 되고 싶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된다고 볼 수도 없고, 십년이나 후의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겠어요?” 하는 것이다. 

 달나라에서는 옥토끼가 방아 찧고 있다는 것을 철썩 같이 믿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할미가, 민간인이 우주여행을 다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미래를 점쳐 줄 수 있겠는가.

 이 아이가 초등하교 6학년 때 한 살 아래인 손자와 둘을 데리고 할아버지 와 함께 경주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 때 손녀가 “나는 두 살 이후에 있었던 일은 생각이 나는데 그 이전은 기억에 없어.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긴 거야.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가 없었어.” 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누나의 말을 듣고 있던 동생이 “누나 나도 그 문제를 연구해 보았는데 죽은 다음에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밝혀내었어. 그것은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끊어지고도 한참동안은 말을 듣고 있다는 거야. 그건 영혼이 살아있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은 아무리 연구를 해도 모르겠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무어라고 말해 주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훌쩍 커버려 변성기가 된 손자는 “할머니,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라며 등을 토닥인다. 이제는 안아주고 토닥이는 역할이 바뀐 것이다.

 외손녀는 공부 열심히 해서 판사가 되어 나쁜 사람들을 벌주겠다고 하며 노는 중간에도 공부를 한다. 5학년이 된 손녀는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다 하고. 

 아이들은 이제 한 걸음씩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매일 생각이 커가고  있으리라.

 어쩌면 지금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펼쳐지는 세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류시화 시인이 인도에서 만난 성자라는 이가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삶에서 만나는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야.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 로 약속을 하고 태어나는 것이지.” 

 인생의 오랜 굴곡을 지나와 이 순결하고 고귀한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영혼끼리의 약속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은 나에게 행복과 함께  남은 생을 더 아름답게 살라는 배움을 주기로 했나본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약속했을까?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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