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딸아, 나 때는 말이다
사십 대 후반의 딸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니 참으로 오래된 일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여성 잡지에 『여자의 마성』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여자는 신이 이성을 잃었을 때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 없는 대신 허영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허영은 야수적 마성으로 변질되고, 그 여인의 마성은 가장 무서운 독소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온갖 여성의 범죄 형태를 모조리 나열하여 이 세상의 모든 범죄는 여자만이 저지른 것처럼 실려 있었다.
하도 기가 막혀 나는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남자의 야수성도 쓰라’는 제목의 반박 글을 실었다.
『어쩌면 나는 마성을 지닌 여자이기에 이 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지 모른다. 모든 생명체가 태어남은 가장 숭고한 신의 섭리이며 그중에서도 인간의 탄생은 누구나 축복받아야 한다.
따라서 남녀평등이란 누가 부르짖을 필요도 없이 당연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글이 그것도 여성지에 실려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부디 귀사에서는 다음 호에 ‘남성의 야수성’을 파헤쳐 이 부글거리는 여성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기 바란다.』
하나, 그 이후 여기에 아무런 대응의 글도,또는 여성들의 동조의 글도 없었다.
딸아,나 때는 말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았단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원시 시대의 남자들은 여기저기에 아이만 만들어 놓고, 자기의 아이가 어디에서 누구로 살아가는지 조차 알바 없이 훌훌 떠나버렸다. 이것은 지독히도 오랫동안 고난의 모계사회를 가져왔다. 증명할 것도 없이 엄마임에는 틀림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세상은 점차 바뀌어 정착생활이 시작되자, 이제는 농사와 전쟁의 책무를 져야 한다는 명분 아래 남자들은 또 밖으로 훨훨 날개를 펼쳤다.
하나, 실은 그것이 가벼운 깃털의 날개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남성은 생존과 전투로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힘들다는 내색을 쉽사리 하지 않았다.
왜? 남자라는 자존심 때문일까?.
그래서 엄마들은 아들의 등이 휘어지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생각난다.
만주 지방에 있던 여진(女眞)족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갑자기 선생답지 않게 장난기가 발동하여
"이 女자는 무슨 의미이지?" 하고 물었다.
초롱한 눈빛들은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메모를 하면서 "여자요." 한다.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리고 이 眞자는 참진자거든. 그러니까 이 여진족은 참한 여자들로만 구성되었지."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는 쪽보다 '아, 옛날에는 그러한 곳도 있었구나.' 하면서 여자들만 사는 곳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 옆에는 남자만 사는 남진(男眞)이 있었지 뭐야. "
"아이, 왜 남진이 옆에 있는 거예요?"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렇지만 어쩌겠어. 그래서 여진+남진 이 되었지. 즉 결혼을 통해서."
"에이, 그래도 그냥 여자 나라로 살면 되잖아요."
"글쎄. 왜 그럴 수는 없었나 오늘부터 연구해봐. 다음에 시험문제로 낼 터이니."
"네? 아, 네에. 꼭 내시는 거죠? 하하하."
깊게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이들은 왜 여자 나라로 살았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을까?
만약에 남자아이들한테 이 이야기를 했다면 그들도 남자 나라로 있기를 바랐으려나?
이 지구 상에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남성과 여성의 수가 거의 반반이다.
이것은 신이 서로 동조하면서 잘 살아가라는 이유에서 설정해 놓은 것인가 보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났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였다. 그에 비하여 여권도 향상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페미니스트들이 세상에 나와 소리를 내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젠더 갈등은 왜 일어나야 되며 나아가서는 여혐, 남혐으로 발전하여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언제 인가는 이러한 문제가 원활히 풀어질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