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에서 장성한 아들이 온갖 갑 질 행태를 저지른 결과 30대의 태형 선고를 받자 그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기절을 했다.
조선 시대의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십대 소년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처참한 왕자의 난을 일으킬 원인을 제공하였다. 애매한 함흥차사에 화풀이를 한들 세상살이를 알기도 전에 죽은 방번과 방석이 살아 돌아 올 리 없으니 덧없는 짓이었다.
또한, 인조 는 병자호란 결과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가는 길에 내 아들을 온돌방에 재워 달라.” 며 청 왕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특히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자기 같이 힘없는 권력의 소유자가 되지 말라고 14세에 세자로 책봉한 기대가 큰 아들이었다.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보낸 아들이 7년 반 만에 서구에서 밀려오는 문물을 접하는 등 성숙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4세의 아들은 4개월 후에 온 몸이 검은 빛이 되고 이목구비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서둘러 장사를 지냈다. 풍문에 아버지가 정적으로 여겨 독살했을 것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영조는 어찌했는가.
무수리 아들로 태어난 자기의 삶과는 다르게 살기를 바랐던 장헌 세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지 않았는가. 그것도 어린 손자의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애원을 저버리고, 초여름의 햇볕아래 숨 막히는 작은 공간의 뒤주에서 처참하게 죽어야 했으니. 전후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아버지로서 그리 할 수가 있었을까. 후에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에게는 다섯 살 때 까지만 아버지가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고, 아버지라는 존재의 필요성도 모르고 자랐다. 그냥 나에게는 엄마만 있으면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잘 커서 엄마에게 효도하는 것이 나의 당연한 도리라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니 나에게 ‘시아버지’가 생겼다. 며느리를 지극히 아껴주신 이유도 있겠으나 그 호칭부터 너무 좋았다.
‘아,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렇게 든든하고 푸근하며, 나에게 폭풍이 몰아쳐도 막아줄 수 있는 커다란 나무와 같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행복감을 맛보게 된 것이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간혹 남편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쪼르르 일러버려 해결이 되기도 했다.
시아버지도 손녀와 손자를 안겨드리니 더없이 행복해 하셨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명동이 가장 번화한 곳으로 밤이면 커다란 맥주 집에서 가수들이 노래도 불렀다. 우리 부부는 시아버지가 서울에 오시면 종종 모시고 갔다. 어느 때인가는 큰딸아이도 데리고 갔는데 김세레나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저기 예쁜 애기와 할아버지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해서 뜻하지 않게 박수를 받았던 적도 있다. 마침 딸아이가 신이 나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아버님이 따라주시던 맥주 맛은 다시 못 볼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사랑은 6년 만에,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받은 적이 없는데 끝나버렸다. 그때까지 나의 삶속에서 그와 같은 애통함은 겪어보지 못했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아버지’라는 이름에 대한 푸근한 사랑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행복의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인간의 행복을 끝까지 지켜 줄 수는 없느냐?’ 고.
그 이후 시아버지는 마음 한가운데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머물러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도 찾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온갖 천태만상의 아버지들이 있지만 변함없이 똑같은 마음은 자기의 자식이 태어났을 때의 신기함과 기쁨일 것이다.
더구나 친구들이 “너의 아들은 너하고 국화빵이야.” 하면 더없이 좋아하는 것이 남자의 속성이다. 오죽하면 ‘발가락이 닮았다.’ 했을까.
미국에서 아이를 낳은 며느리가 첫 아들을 낳고 전화를 했다.
“어머니, 애기의 귀가 아버님 귀하고 똑 같아요.”
그 말을 듣자 남편은 그야말로 입이 찢어지게 좋아했다.
어떤 이는 아이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은 그 아버지의 자식이 틀림없다는 증거를 굳히기 위해서라고 했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식이 자기를 뛰어넘어 더 훌륭한 존재로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그에 따른 자기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할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더러는 부자지간에 죽임도 불사하는, 믿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다.
우리를 몹시 슬프게 하는 인간사 이다.
과거의 우리나라에는 엄부자모(嚴父慈母)라 하여 아버지의 표상은 권위적이고 엄격하였다. 또한 자녀에 대하여 큰 테두리의 훈육을 담당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살아갈 자녀를 위하여 어떠한 아버지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
지난날에 비해 오늘의 아버지는 많은 부분을 힘이 커진 아내에게 빼앗겨 설 자리가 없다고들 한다. 그것은 어쩌면 과거의 남자들만이 독점하던 자리를 오늘 날 많은 여자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높아진 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한다.
아니면, 밖의 일에 허덕대다 보니 집안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미명아래 아버지의 역할을 아내에게 떠넘기다보니 그 자리가 줄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각자마다 자기의 역할담당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부모가 바로 서야 자식도 바로 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 맨 앞자리에서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임에 한 치의 틀림도 없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성인 아들의 체벌만을 안타까워 기절하는 아버지의 역겨운 꼴이 과연 아버지로서의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경처의 아들이 애틋하여 왕위를 주려하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을 겪고 말았던 태조는 어떤 아버지라고 평가 받기를 원했을까?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어떠한 이유에서건 아들을 죽인 것이 맞다 면 인조의 처사는 비정함이라는 말로는 성이 안찬다.
끝내 아들을 품지 않고 잔인하게 죽인 영조는 아버지 이전에 왕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 그 변명에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을까?
인류 역사의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만고의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인격을 갖추었을 때 이루어 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