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평화와 행복만으로 가득 할 것이다. 어느 시인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평화로운 시대를 상징적으로 말할 때 중국 전설시대의 왕조 오제 중에 요, 순 시대를 내세우는데 그 때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들로 살았길 래 그렇게 불리 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한 시대의 밑거름이 된 것은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은 이러한 임금을 사랑하고, 또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이 넘치는 사회는 살맛나는 세상이리라.
사랑에는 기쁨과 환희가 따른다. 사랑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 누구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마음에서 샘물 솟듯 끊임없이 솟아오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41세에 독신으로 왕이 되었다. 사교계에서 유명한 이혼녀인 심프신 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지만 왕비로 적합하지 않다하여 모두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자 11개월 만에 동생(현재 엘리자베스 2세여왕의 아버지)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윈저 공으로 다음 해에 심프신과 결혼 하였다.
심프슨 부인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으로 모든 여자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나에게도 그러한 남자가 있다면 그를 위하여 무엇은 못하겠느냐?’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역사적으로 왕위를 빼앗기 위해 부모, 형제, 조카 등을 죽이는 일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았던가. 작은 나라에서도 그러했는데 더구나 막강한 나라 영국의 왕위를 내어 놓다니 가히 사랑의 위대함이란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한 것 같다.
왕위와 사랑을 다 지키기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런가 하면 눈물조차도 감추어야 하는 사랑도 있으니 그것은 사랑 이상의 그 무엇일까? 이렇게 슬픈 사랑도 있다는 것이 슬프다.
원하지도 않은 왕이 되어 권력을 가졌음에도 왕이라서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 연산군의 실정으로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중종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은 신 씨가 열세 살 때 가례를 올려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았다. 진성대군은 중종반정이 일어난 밤에 병사들이 오자 연산군이 죽이려고 보낸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그 때 부인 신 씨가 “말꼬리가 우리를 향해 있으면 우리를 지키러 온 것이다.” 하고 서두르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열아홉 살에 왕이 되었으니, 곧 중종이다.
진성대군을 왕으로 만든 공신들은 부인 신씨의 아버지이며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한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하였다 하여 죽였다. 따라서 왕비가 된 신씨의 보복이 두려워 폐위시켜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들에 의해 왕이 된 중종은 이것만은 막으려고 간청을 하였지만 그러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결국 신씨는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왕은 사랑하는 부인과 생이별을 하며 자신의 무력함에 눈물만을 삼켜야 했다. 어린 왕비 또한 자신을 가누기가 힘겨웠다.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가 신 씨의 친정집이 있는 인왕산 사직 골 쪽을 바라보며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허나 그런다고 그리움이 잦아들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신 씨는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곳의 바위에 궁에 있을 때 입었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그 후 이 바위를 ‘치마 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인지 맑은 날에 보면 그 바위는 분홍빛을 띄우고 있다. 아마도 신씨의 빨갛게 타오르지 못한 분홍색 사랑에 그 딱딱한 바위도 함께 눈물 지었나보다.
이후 중종의 새 왕비가 죽자 신 씨의 복위가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영조 때 가서야 복위 되어 ‘단경 왕후’라 불리게 되었다.
단경 왕후는 자식도 없이 쓸쓸히 살다 71세에 사망할 때 까지 한 번도 중종을 만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랑을 애달프다, 애절하다, 슬프다, 등등의 말로 다 표현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왕이라 하지만 왕으로 만든 이들의 힘에 밀려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만 한 왕의 비애가, 그리고 왕비의 처절한 삶, 그들은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아마도 가장 이른 봄에 바들바들 떨며 올라오는 작고 흰 ‘눈 풀꽃’처럼 애처로운 삶이었겠지?
혹 붉은 백일홍이 피었다 다 지기 전에 님 을 만날 염원이 담긴 눈물로 물을 주며 백일을, 또 백일을 보냈으려나? 꽃이 피고 지기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이제는 줄 눈물도 없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존재’라고 하였다.
정말 인간에게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오늘도 답을 찾아 헤매는가?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왕이 또 한명 있다.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은 흔히 ‘강화도령’이라고 불리 운다.
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 후궁의 소생으로 그의 셋째 아들 전계 대원군이 원범의 아버지다. 원범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첫째 형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세력들과 그 당시 세손이었던, 후에 정조 대신 왕으로 추대 받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이에 연루된 자들과 함께 사사되었다.
원범은 반역 죄인으로 몰려 사약을 받은 큰아버지 일로 할아버지,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만난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후, 할아버지는 역모로,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천주교도로 몰려 목숨을 잃는 등, 가족 모두가 제주도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자결 하거나 사사되었다.
작은 형과 둘만이 남아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총명한 형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역모의 우두머리가 되어있었고, 그로 인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자 원범은 형을 따라 왔다.
강화도는 원범에게는 고향이어서 좋았으나, 형이 열여덟 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되니 열네 살의 원범은 고아가 되어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천민과 같이 살았다.
또한 언제 자기도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한 때에 어느 날 약수터에서 예쁜 처녀 양순이를 만났다. 어려운 처지의 둘은 서로에게 위안의 대상이 되어 더 가까워 졌으리라.
잦은 만남은 순박하고 청초한 들꽃처럼 아름다운 사랑으로 꽃 피워졌다. 혼인을 약조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낼 수 있어서 원범은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원범이 열아홉 살이 된 어느 날이었다.
이때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었으나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6촌 이내의 왕족이 있어야 하는데 한명도 없었다. 안동 김씨가 나중에 왕이 되어 자기네의 권력에 장애가 될 만한 왕족은 미리 처단하였기 때문이다.
7촌인 원범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하여 그들의 세도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순조의 양자로 만들어 왕으로 삼았다. 이가 철종이다.
왕이 되었으나 3년간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스물한 살 때는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장인의 세도 정권이 되어 아무 힘도 없는 왕이었다.
사실 원범은 왕이 되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이 모두 죽는 것을 보아 온 그는 그냥 양순이 와 혼인하여 조용히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으리라.
그것도 뜻대로 될 수가 없으니 끌려가듯이 왕이 된 것이다. 거기에 양순이를 데려 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양순이 또한 뜻하지 않은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꼭 데려가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밖에.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한편, 원범도 한 시도 양순이를 잊은 적이 없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후궁으로라도 데려오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허사였다. 양순이가 천민이라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한 양순이는 궁궐로 찾아갔으나 왕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이나 어려운 일이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밤하늘에 달님, 별님에게나 소원을 빌며 눈물짓는 것이 다였다.
정사를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허수아비 왕은 점점 술과 궁녀를 가까이 하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가다 보니 원래는 건장한 체격이 점차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왕이 양순이를 못 잊어 한다는 이유로 급기야는 죄 없는 여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욱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양순이는 억울하게 죽어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깊은 산골에 나지막하게 숨어있듯이 피어있는 노란 설련화가 되지 않았을까?
슬픈 추억을 꾹꾹 눌러 삼키면서, 황혼에는 해 무리 속으로, 달무리 지는 밤이면 그 안으로 들어가 한숨을 쉬려나?
어쩌면 밤마다 소쩍새의 슬픈 울음소리를 빌려 임금의 방 밖에서 한을 토해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못된 시어머니에 의해 굶어죽은 며느리의 혼인 소쩍새의 눈물보다 더 깊은 슬픔 이었을까?
원범은 다만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궁궐에 갇혀 허울만 쓰고 있는 왕.
숱한 가슴앓이로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진 왕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섣달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사도 없었다. 왕후와 후궁 등 여덟 명의 부인들에게서 아들 넷을 낳았으나 다 어렸을 때 죽고 한명의 옹주만 남았다. 그 옹주도 태극기를 만들어 처음 사용한 박영효와 결혼 하였으나 석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아마도 이제는 그 무거운 곤룡포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양순이를 찾아 갈 수 있어서 좋았으리라. 훨훨 날아가 양순이와 손잡고 진달래 핀 산속을 뛰어다니며 못 다한 사랑을 나누리라.
그 옛날처럼.
이 세상에는 왜 그리도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 많을까?
사랑에는 오로지 사랑만이 있을 뿐인데, 거기에 왜 조건이 심술을 부린단 말인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한번이라도 만나는 견우와 직녀는, 그래도 또 일 년을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나은 것인가?
아! 그들도 애처롭다. 오죽하면 칠월 칠석 다음 날에는 눈물이 빗물 되어 이 땅에 내릴까.
인간의 모든 사랑에는 순수한 사랑 본연의 빛깔만으로 빛났으면 좋겠다.
사랑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리하면 더 풍요로운 사랑이 샘물처럼 솟는다. 그러나 슬픈 사랑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