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단순히 '과학소설'의 원형이라 평가한다면, 이는 마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여행기라고 부르는 것만큼 답답한 얘기가 된다.
라고 역자는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는 정말 다양하게 소비되고 있다. 특히 디즈니 풍의 영화에서, 그리고 그 밖의 서양 영화에서, 그 연한 푸른빛의 피부에 나사를 머리에 꽂고 괴력을 발휘하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고 '괴물'은 그냥 괴물로 등장한다. 눌변의 괴물이 아니라 사악한 혀를 지닌 악마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발견이어서 황당하기까지 한, 어떻게 원작의 괴물을 이렇게까지 입맛대로 비틀어서 사용할 수 있나 싶어서 작가에게 미안할 정도였다.(내가 왜?)
내가 늘 말하지만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괴물을 창조하고 괴물이 횡행하는 모습은 굉장히 단출하다. 어떻게 보면 허술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책을 놓지 못하고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폭주기관차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디에서 리얼리즘을, 어디에서 설득력을 획득했을까?
내가 생각해 보건대 괴물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마음속에 사악하고 잔인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괴물'이지 않을까? 굉장히 그럴듯하게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서 괴물이 현실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사악한 마음이 바로 그 괴물이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속에도 그 괴물이 엄연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성을 갖는 것은 아닐까?
그 괴물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 하지만 당신은 내 불행을 보상해 주고 악행에서 구해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 죄는 점점 더 커져서, 당신과 당신 가족뿐 아니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 분노 속에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클레르발을 죽인 후, 나는 슬픔에 무너지고 철저히 피폐해진 심장을 안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프랑켄슈타인이 불쌍했다. 공포심에 가까운 연민을 느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내 존재와 그에 수반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는 비참과 절망을 쌓고 또 쌓아 안겨준 주제에 영영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나를 끔찍하게 허기진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내가 했던 협박을 기억해 낸 나는 그대로 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고문 행위를 자초하는 짓임을 알고 있었으나, 나 자신은 충동적 본능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와 같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괴물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납득하게 되는......
내 마음속의 사악함도 결국 '나'라서 어찌할 수 없는......
거기에 설득력이 있고 리얼리즘이 있다.
어느덧 선생질(?)을 꽤 하면서 수많은 괴물을 창조하고 있는 나로서는 괴물의 절규를 남 이야기 듣듯 넘기기가 곤혹스러운 면이 있다. '안 되는 놈은 안돼. 안 되는 놈에게 엄한 에너지를 쏟을 게 아니야.'라고 편히 말하고 마는 '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