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얼마 전에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이 소설 '페스트'를 떠올렸다.(특히 시즌1에서는)
'외부의 거인'이거나 '내부의 페스트'이거나, 어쨌거나 갇혀 있는 사람들이라는 모티브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
이거야말로 소설 페스트에 대해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문장들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그 애니와 이 소설은 차이점이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은 시지프 신화의 서두에서 카뮈 형이 말했던 인간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등장인물을 통해서 우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주 본질적인 질문.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지?
이방인의 뫼르소는 죽음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사형수의 자유'를 깨닫는다.
네가 세상이 부조리함을 인정하고 결국 가장 큰 부조리인 죽음마저도 인정한다면 자유를 얻을 것이요. 남은 삶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열정을 가지고 살면 된다.
요런 이야기인 것 같긴 한데, 뫼르소는 사형수이고 살 날도 얼마 없지 않은가?
그럼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지? 자유를 깨닫고, 열정을 가지고 살면 된다는데......
허, 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요즘 말로 쌉소리)로, 그야말로 너무 추상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부분에서 나름 구체적인 답을 제시한다.
카뮈는 페스트라는 부조리함 속에서 의사 리외를 통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나름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쫓기던 범죄자 코타르는 오랑이라는 이 도시가 폐쇄되자 오히려 활기를 찾고
파늘루 신부는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 버린다.
그랑과 타루는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면서, 랑베르도 자기만 행복할 수 없어서 도시에서 도망치지 않고 남는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각자 페스트의 상황에서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외.
얼핏 보면 도덕 교과서에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평면적 인물이지만(그래서 소설적으로다가 매우 흥미 있는 인물은 아닌 것 같지만),
카뮈 형이 제시하는 정답에 가까운 인물이지 싶다.
“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절대적으로 옳아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을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내가 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여기서 페스트를 삶의 부조리함으로 바꾸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강령처럼 들린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파늘루가 리외 곁에 와서 앉았다. 그는 깊이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선생도 나처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잖아요.”
리외는 웃으려고 애를 썼다.
“인간의 구원은 저에게는 너무 거창한 단어입니다. 그렇게까지 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관심 갖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건강이에요.”
도시의 폐쇄가 끝나고, 리외는 페스트 때문에 헤어졌던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는다. 페스트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친구도 잃었다.
살아남았지만 리외에게 남은 것이 뭐지?
타고 남은 연탄재(누군가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한) 같은,
폐허에 외롭게 홀로 서있는 듯하게,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리외는 살아갈 것이다. 성실하게.
페스트가 완전히 종말한 것이 아니고 리외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외는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받아들일 수도 없기에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그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대항해 완수해야만 했고 아마도 여전히 완수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증언에 불과했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카뮈 형이 제시하는 답이다.
이방인보다 훨씬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좀 쓸쓸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