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들의 아침식사(커트 보니것)

by 궁금하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나로서는 그렇다.

처음에 느낀 시니컬한 농담의 신선함(더불어 친절한 그림까지)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졌다.


교사들은 인간이 이 대륙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때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사실 1492년에는 이미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그 대륙에서 충만하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1492년은 해적들이 그들을 속이고 약탈하고 죽이기 시작한 해일 뿐이다.


베트남은 미국이 그곳 사람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비행기로 이런저런 것을 떨어뜨리는 나라였다. 그가 언급한 화학물질은 공산주의자들이 비행기조종사의 눈을 피해 숨기 더 어려워지도록 나뭇잎을 죄다 죽여버리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쉰 살이 되면 유치하게 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모욕하고 사인펜으로 나치 깃발과 똥구멍과 다른 많은 것을 낙서하도록. 이 책을 위한 나의 삽화가 얼마나 성숙한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내가 그린 똥구멍 그림을 선보이도록 하겠다.(여기에서 '나'는 작가)

(뭐 이런 식이다)


만약에 매사에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친구가 주변에 있다면(게다가 산만하기까지 하다면)

그 친구와 가까이할 수 있을까?


마치 그런 친구와 억지로 일주일을 보낸 느낌이다.

나는 빨리 이 친구가 갔으면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했다. 쉽지는 않았다.


물론 이 소설도 인물이 있고 사건도 배경도 있다.

소설의 구성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우선 킬고어 트라우트


구멍에 비친 트라우트의 이미지는 그가 바라던 대로 충격적이었다. 그는 명왕성 갱단에게 구타당한 후 씻지 않았고, 그래서 한쪽 귓불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왼쪽 콧구멍 아래에도 꽤 묻어 있었다. 외투 어깨에는 개똥이 묻어 있었다. 퀸즈버러 다리 아래에 있는 핸드볼 코트에서 강도를 당한 후 개똥 위로 쓰러졌던 것이다.


도색 잡지에 자신의 글을 올릴 수밖에 없는, 늙고 가난한 SF소설가다.


그리고 드웨인 후버

부유한 폰티악 자동차 판매 딜러다.

그는 돈도 많고 비서와 바람도 피우지만 점점 미쳐간다.(아들 버니 후버는 게이이고 마누라는 자살)


“나는 완전히 새로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프랜신.”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부드러운 팔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 해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미들랜드시티에 사는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 했고 앞으로 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어. 새로운 사람이어야만 해.”(프랜신 페코프는 비서)


멀리 떨어진 채 각자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가던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미들랜드시티에서 만나 결국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야기. 드웨인은 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은 자리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계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만 빼고.

(이것 봐, 인물, 사건, 배경이 다 있지)


그런데 도무지 몰입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의 메타픽션적 장치가 끊임없이 몰입을 방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계속해서 스포일러 하기 때문이다.(소설이 자신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성찰하는 방식의 서사 기법)


머지않아 버니 후버는 드웨인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고 킬고어 트라우트와 같은 구급차에 타게 될 것이었다.


들어보라. 프랜신 페코프는 바로 옆에 있는 드웨인의 자동차 대리점에 있었다. 그녀는 그날 오후에 해야 했던 모든 밀린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드웨인은 곧 그녀를 두들겨 패게 될 것이었다.


즉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는 킬고어 트라우트와 드웨인 후버를 창조한 작가이고

소설 속에서 이들과 한 테이블에 앉는다.


혼란스럽고 몰입할 수가 없다.


미국을 실제 삶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토록 위험하고 불행한 나라로 만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나서부터 나는 이야기 짓기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 쓸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또한 모든 사실이 똑같이 중요한 무게를 지닐 것이다. 아무것도 제외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대신 질서에 혼돈을 부여할 것이고, 실은 이미 그렇게 한 것 같다.


미국 사회에 대한 냉소적 비판.

소설에 대한 다양한 실험.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이 높게 평가받는다지만

나로서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지독한, 정말 지독한 소설이었다.

'혼란'이라는 작가의 의도에 정확히 넘어가 버렸다.

작가의 이전글페스트(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