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영'이 이눔 저눔과 사랑을 나눈다. 대도시 서울에서
그렇다. 별다를 것도 없는 없는 줄거리다.
그런데 영화화되고, 드라마화되고 화제가 된 모양이다.
그러면 스릴 넘치는 구성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소설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캐릭터 때문인가?
주인공과 이 사회에 대한 묘사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켰나?
주인공 '영'은
이 대도시에 살고 있는 소수자, 즉 게이 남자다.(처음 책 표지를 넘겼을 때는 몰랐다)
그는 이 연작 소설의 서술자 '나'다.
명실상부 학과의 아웃사이더였던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어서 단지 평균보다 덩치가 좀 큰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 선배들의 자취방 모임에 초대받고는 했다. ...... 한 번은 취한 채로 "쥐좆만 하게 생긴 것들이 허풍 좀 작작 떨라고" 소리를 지르며 솔상을 엎었더니 그 뒤로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뭐 그런 캐릭터다. 성적 소수자이자 자발적 아웃사이더.
그리고 '재희'는
주인공 영이 남자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후 영과 친구가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재희에 대해 잘 몰랐고 다만 언제나 짧은 바지를 입고 다니며 수업이 끝나면 누구보다 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 담배를 피우는 애 정도로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실은 학과에서 재희의 평판은 최악에 가까웠다.
둘은 동거를 하게 되고 서로의 진상 남자친구들(?)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존재가 된다.(결혼식 축가까지 불러주며 눈물을 흘리는, 진정한 친구이상의 친구)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
첫 편 '재희'는 그렇다.
개 같은 세상에 남겨진, 약하고도 선량한 존재들, 서로 연대하며 세상을 헤쳐나간다.
현실은 시궁창이고 그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이 친구들은 눈물겹지만 또 경쾌하다.
어려울 때 웃어야 일류라고 했던가?
현실이라는 쓰레기통 속에서도 농담으로 세상을 경멸할 줄 아는, 발랄한 캐릭터들이다.
그래서 참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부터
영의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가 점화되면서 나는 조금 영과 멀어지고 말았다.
주인공 영, 그러니까 서술자인 '나'가 엄마를 처음 간병할 무렵 만나게 된 띠동갑 형은
운동권 출신, 프리랜서 편집자, "꼰대 디나이얼 게이", "마지막 운동권 세대", 우럭 한 점에서도 우주의 맛을 논하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미제의 악습이라며 깔깔대는 학과 선배 부부 앞에서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과대 학생회장으로 운동했던 경력 때문에 여전히 정부로부터 감시당한다는 망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주제에 그를 위해 파스타를 만들어주는 영에게 좋은 남자 만나라고 이별을 고하는 양반이다.
엄마는
동성애자인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광신자다. 나(영)를 사랑한 것 같기는 한데 미친 듯이 나를 괴롭힌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듯이. 자기가 병든 줄도 모르고.
나는 16년(그러니까 평생) 동안 엄마 인생의 대리물로서, 나 자신의 심리적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우리 모자 사이에 일어났던 몇 가지 일화를 들은 전문의는 내가 아니라 엄마의 치료가 시급한 상황인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보호자를 호출하는 선에서, 나는 간신히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 엄마는 마티즈 안에서 내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레위기 20장......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든 저 여자가 늙고 병들면 경기도의 외진 숲에 내다버리고 말리라, 산 채로 미친 들짐승의 먹이로 만들 것이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그리고 세 번째 편, 대도시의 사랑법의 '규호'는 영보다 어리고 영과 엄청 사랑하는 사이다. 네 번째 편의 하비비를 만나면서도 계속 그를 떠올릴 정도다.
그리고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갔다. 서로의 농담에 크게 웃었고 키스를 했고, 생선 살을 발라 서로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고, 가끔 함께 씻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집에는 규호의 이민 가방이 배달되어 왔고, 규호의 물건들이 서랍장을 빠져나가 가방에 담겼다.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사랑하지만 사실 영은 병이 있고 규호를 떠나보낸다.
이렇게 영은 이눔저눔과 사랑을 나눈다.
첫 편이 시궁창에서도 농담을 잃지 않는 경쾌한 이야기다면
뒷 편들은 삶의 고통이 오롯이 느껴진다. 이 사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게이 남자들의 처절한 현실.
이때부터는 농담도 왠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더해서 남자끼리 사랑하는 과정의 디테일한 묘사. 나로서는 '헐'이었다.
정치적으로 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내 취향이 아닌 것에 대한 거부감.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을 상상하며 불편해하는 나.
아직 내가 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