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이 말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을 이처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생은 고통
인생은 권태
인생이란 고통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인생이란 권태롭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고통과 권태를 하나로 엮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약간은 뒤통수 맞은 느낌(?) 정도를 받았다.
어쨌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요즘 쇼펜하우어가 굉장히 인기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도 관련 도서들(제목에 쇼펜하우어 들어가는 책들)이 거의 모두 대출 중이더라.
남아 있는 몇 권 없는 책들, 그중에 좀 쉬워 보이고 짧은 책으로 한 권 빌려온 것이 이 책이다.
우리 쇼 선생은 나에게 무슨 해답을 줄까?
나는 큰 기대를 품고 책장을 넘겼다.
어쨌거나 인생을 이렇게 정확히 짚어내시는 분이니, 뭔가 기막힌 해답을 주시지 않을까?
얼마 전, 카뮈 형은 내게 약간의 실망을 줬지.(용두사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카프카 형은 내게 '어쩌라구'하는 짜증과 슬픔을 줬었던 것 같어.
쇼펜하우어 선생은 좀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카뮈는 굉장히 개별적 차원의 솔루션을 준다면
쇼펜하우어는 함께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흠.....
이 책에서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은 고통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충분히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충분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고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리는 타인과 내가 전혀 다른 존재라고 느낀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그도 나도 의지가 현상화된 표상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가 너라는 사람으로 개체화되고 나라는 사람으로 개체화된 것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존재다. 물론 너에게는 의지가 너라는 신체를 형성하면서 가지게 되는 경향성이 있고, 나에게도 의지가 나라는 신체를 형성하면서 가지게 되는 경향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와 내가 완전히 다른 개체인 것은 아니다.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나라는 개체와 너라는 개체가 완전히 분리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문제에도 이처럼 무심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인생이라는 게 그러함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삶의 진실은 ‘인생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흘러가고, 인간은 거기에 좋네 나쁘네 추임새를 넣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인생의 일들에 자기에게 유리하면 좋다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나쁘다고 난리를 치지만, 세계를 만들고 일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장하는 의지는 그저 아무런 목적 없이 작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 비가 오느냐고 따져도 비가 그치는 것이 아니듯이, 의지가 맹목적으로 그렇게 춤출 때 왜 그렇게 작용해서 나를 괴롭히냐고 따진다면 해서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저 인간 혼자 기운 빼는 일일 뿐이다.
욕망이 있으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괴로워지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린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삶은 결핍이 있거나 권태롭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사람들이 주목한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이렇게 생의 고통에 대해 썼기에 ‘염세주의’라 불렸을 터이지만 고통을 직시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동고(Mitleid)할 것을 주문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염세주의라고만 치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고라니, 아, 친구들과 함께하면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가 훨씬 낫지.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연대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곤 한다.
그렇다. 이점은 확실히 카뮈와 다른 점이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 선생도 여기까지다.
그래봤자 정교한 정신승리의 기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라는 것인데,
세계는 원래 엿같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인데,
......
그거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거잖아?
우리가 출판을 못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