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by 궁금하다


자기 계발서라는 책들이 있다. 내게는 굉장히 천박한 느낌(?)을 준다. 바로 눈앞의 문제에 매달리는 느낌, 대증요법, 얄팍한, 등등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고, 또 내 천박한 허영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의 첫머리에서 김정운(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먼저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미국식 자기 계발서를 싫어한다. 어설프게 위로하고, 빤한 인생과 꿈을 이야기하는 책은 정말 질색이다. 일본식 자기 계발서도 대부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윽박지르지 않고,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따진다. 책 속의 ‘청년’처럼 “이건 또 뭔 소리지?” 하는 의문이 자주 든다. 그리고 저자의 논리와 부딪히면서 책을 읽게 된다. 흥미롭다.


라며 따뜻하게 내 허영심을 어루만져 주는 말을 먼저 해 준다.(나 같은 사람도 꽤 많은 모양)

그래서 읽게 된 책.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전체적으로 청년과 철학자라는 인물의 대화체로 되어 있고, 그래서인지 술술 잘 읽힌다)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두 번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세 번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네 번째 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다섯 번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이 책은 첫 번째 챕터인 '트라우마를 부정하라'에서부터 상처 입은 나를 위로해 준다.


철학자: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음 그랬구나'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위로로 끝나는 것은 좀 허무하다.(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이어지는 철학자의 여러 가지 말들은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게 내게 다가왔다. 노답인 데다가 찌질한 내 인생을 좀 바꿀 수 있는 솔루션이 아닐까?


모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필요는 없고, 그러자면 용기를 가지면 된다.

나와 다른 사람의 과제를 헷갈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과제를 내가 억지로 떠안을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결국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면 된다.


청년: 나아가 목적론의 대전제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늘 스스로 생활양식을 선택한다면서.

철학자: 그래

청년: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자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말한 것 중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습니까?

철학자: 없네.


철학자: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마치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네. 물론 그 거짓말은 머지않아 발각될 테고, 그리고 신용을 잃고 인생은 더욱 고달파지겠지. 물론 계속된 거짓말로 인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하네. 자네는 이걸 이해해야 돼.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오, 그럴 듯 하긴 하다. 게다가 필요한 것은 용기뿐.

그런데 내가 간단히 읽은 카뮈나 쇼펜하우어(진짜 간단히)를 읽을 때와 비슷한 목마름이 있다.


유전자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말은 참 좋긴 한데......


철학자: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주장하지. 즉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네. 하지만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다면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청년: 뭔데요?

철학자: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여기에서의 '자유'는 카뮈가 이야기한 사형수의 자유(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철학자: 설사 자네나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

청년: 만약 제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찰나는 늘 완결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이렇게 지금, 여기를 최대한 열심히 살면 된다고 말해주는데......

그래서 뭐?이다.


이 책에서 '철학자'는 마치 스스로가 아들러의 화신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들러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기시미 이치로였고, 그나마도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미움받을 용기 - 나무위키 (namu.wiki)


보통의 자기 계발서와는 다르다고 했지만

결국 보통의 자기 계발서.


젠장


몇몇 구절이 머릿속에 남긴 하지만

그래서 뭐?이다.


목마름은 계속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라비안 나이트1(리처드 F.버튼, 김병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