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이 책은 '제목'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 '가짜 노동'은 여러 가지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목 자체가 '가짜 노동'이라는 것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고 그래서 독자는 부정적인 편견을 장착한 채 독서를 시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가짜'라는 것은 부정적 이미지이고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가짜 노동도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의 글이 가질, 정확한 책 제목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물론 대중적인 서적에 요런 시비는 좀 쓸데없지만)
일찍이
어린이들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뽀로로는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아'라고 선언한 적이 있고 그 말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크나큰 울림을 주었었다.
일부 어른들은 노는 거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라는 외침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그러면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가짜 노동'이라는 말은 노동 자체는 훌륭한 것이고 나쁜 것은 '가짜' 노동이라는 어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이게도,
먹고살고자 한다면 놀 수만은 없다.
거기에서 노동의 필요성, 가치가 발현된다. 그리고 이왕 할 바에는 좀 보람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논리의 흐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분 양보하여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자.
그러면 '가짜 노동'은 나쁜가?
일하는 척하면서 임금을 타 먹는 것이 나쁜가?
내가 처음 느낀 반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일하는 척하면서 자본가의 돈을 좀 융통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에이 딱 걸렸네. 젠장
이보시오, 거 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부스러기를 조금 먹는 것조차도 놓치지 않다니, 거 너무한 거 아니오?
생산성 타령 하면서 쫓아내야 할 '가짜 노동' 운운하면 우리 같은 서민 노동자는 참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참 동안 계속해서 삐딱한 마음을 가졌다.(예를 들어 저항 노동, 요렇게만 이름 붙여도 전혀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작가들에 대한 나의 오해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작가들은 진지했고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대놓고 무시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작가들은 우선 21세기의 발전이 과거처럼 빠르지 않은 이유로 생산성의 저하, 곧 '가짜 노동'을 들고 있는 듯하다.
스탠퍼드의 경제학자 찰스 존스의 견해도 이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그는 1950년에서 1993년 사이에 이루어진 성장의 80%가 이미 예전에 나온 발상과 발명의 정교화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이 관점에 의하면 달 착륙조차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다. 1969년 인류는 현대의 휴대용 계산기 속에 담긴 연산 수준의 기술을 이용해 달에 착륙했다. 그리고 반세기 후 인류의 연산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성취의 속도는 예전과 같지 않다. 더 이상 어느 분야에서도 도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산성 저하, 곧 주 15시간 일하게 되지 않은 이유로 '노예상태의 법칙'(노동의 도덕성은 노예의 도덕성. 근면성실?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자-게으름에 대한 찬양 (brunch.co.kr) 버트란드 러셀)과 '개신교'를 들고 있다.
1932년 러셀은 하루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했고 당시 많은 지식인이 동의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 러셀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 하루 4시간 노동이 도입되지 못했을까? 러셀에 따르면 ‘노예상태의 법칙’과 종교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노동을 그 자체로 숭배하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로 보았다. 할 일이 적으면 어른은 술을 마시고 아이는 못된 짓에 빠지게 된다는 주장도 많았다. 러셀은 그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즉, 게으름은 개인뿐 아니라 문명사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셀에 의하면 1932년의 미국인들은 여가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자기 자식들조차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문화와 교양을 즐길 시간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우선은 시간 자체가 줄어들지 못하고 그 시간은 '가짜 노동'으로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수많은 '가짜 노동'의 사례들이 나열된다.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줘야 하는 신기술이 사실상 우리를 점점 더 옭아매왔다. 세탁기로 많은 양의 빨래를 빠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집안일이 더 편해지고 여가 시간이 늘어냐야 했지만, 실상은 어떤가? 한 달에 한 번 옷을 빠는 대신 매일 빨아야 한다. 마차보다 훨씬 빠른 자동차는 시간을 절약해 주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점점 더 먼 거리를 오가게 만들며 운송에 더 많은 시간을 쓰도록 했다. 편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한 온라인 이메일 덕분에 시간이 대폭 절약되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과거에는 편지를 쓰기 위해 하루에 몇 분 내지 몇십 분을 썼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이메일함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으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 가속화에는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기술은 결국 더 많은 일을 만들었다.
프레데리크는 모든 걸 감사하고, 모두를 감시하는 새로운 행정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걸 맞춰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행정팀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뭘 봐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강사들이 다양한 자료를 사용하는지 주시합니다. 당연히 강사는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문제는, 경제학에서 역사적 배경지식 없이 낯선 새 논문을 읽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연구는 당연히 이전 연구 결과에 기반을 두니까요.” 한 번은 행정팀에서 그가 1970년대의 논문을 수업 자료로 쓴다고 비판했단다.
키르스텐, 루이세, 프레데리크 모두, 최신 경향을 따라 업계의 다른 이들과 비슷해지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 관리 시스템의 덫에 걸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개인이 시스템에 맞서 싸우기는 힘들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고 상당히 분별 있어 보이는데 실행 과정에서 가짜 노동을 발생시키는 시스템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어쩌면 지루하게 이어지는 '가짜 노동'의 사례들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서 작가들은 '가짜 노동'이 생산성의 저하라는 경제학적 피해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아간다.(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했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나는 그런 의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삐딱했기 때문에?)
일단,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복 받은 녀석이라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친구랑 술 한 잔 하러 가서도 말할 수 없고 관리자에게 당연히 말할 수 없다. 말했듯이, 이건 금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고 적응할 수도 없으니 불만이 쌓인다.
직장에 출근해서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심각하게 길게 느껴진다. 결국 지루함은 실존적 고통에서 수치감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유용한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일을 통해 세상과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쓸모없어진다는 것, 그러면서도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혐오와 수치감으로 이어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 빚진 기분을 느끼게 한다.
즉 '가짜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자괴감.
이것은 직장인이라면 모두 느끼는 고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악하게도 자기 나름의 정신 승리 기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헛짓거리'(타의에 의한)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 비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거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 가지 차원을 이야기한다. 개인적 차원과 조직 관리자 차원, 사회 전체로서의 차원 말이다. 그리고 본인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면 여기서 읽기를 멈춰도 된다고 말한 후 작가들의 솔루션을 밝힌다.
개인 차원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기, 이젠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할 것, 회의는 무조건 짧게, 불완전함을 감수할 것, 먼저 믿음을 주어 신뢰 쌓을 것, 가짜 노동 명확하게 구분하기, 타인에 대한 모방을 경계하기 등을 이야기한다.
나는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고 있고, 타인에 대한 모방 경계하기라든지 복종하지 않을 의무 같은 것을 실행하고자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관리자 차원에서는
가짜 노동에 맞설 용기, 역할과 권위를 받아들이기, 직접 결정을 내리기, 관계 지향적 리더와 전문가의 균형,
관리직의 수는 적게, 비판적 질문에 대한 보상의 필요성, 과정이나 시간보다 중요한 결과 평가, 원한다면 그냥 놀게 하기, 의미 없는 일에서 벗어나기, 현실적인 일에 집중하기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차원에서는 특히 보편적 기본소득이 인상적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인력의 외부화는 점점 자라나는 경향이며 조심스레 활용하면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 프로젝트 노동자도 정규 근로자와 같은 수준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씨앗이 엉뚱한 곳에 뿌려져 비참하고 위태로운 노동 조건을 영위해야 하는 주변화된 사회집단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그래서 보편적 기본 소득이 필요해진다. 노동자들이 안정된 기본 소득을 받을 수 있게 되면 프로젝트 사이에도 집 규모를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된다. 회사에서는 특정 문제를 해결할 때 임시직 노동자를 불러왔다가, 직장 내 문제적 정규직 고인 물로 전환되기 전에 집에 보내면 된다.
나름 굉장히 성의 있고 진지하다고 느꼈고 엊그제 읽은 미움받을 용기와 통하는 부분을 느꼈다.(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다만
북유럽의 작가들인 만큼 우리 사회와 적확하게 들어맞지는 않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천박하고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아직 먼 이 나라에서는 양날의 검처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다. 치열한 삶을 신화처럼 보여주는 '극한 직업' 같은 프로그램과 유럽의 '가짜 노동' 사회와의 간극이 아직은 제법 크다는 생각도 조금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