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한 사람도 외로움을 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사랑을 안다.
그렇지만 가난 때문에, 그런 감정들을 누리는 것이 사치가 된다. 무심한 듯 주눅 들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내면.
1988년에 발표된 신경림 시인의 시와 1846년에 발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무척이나 닮았다.
19세기의 러시아와 20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에서, 이처럼 닮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 바르바라와 마카르는 매우 가난하고 그런 주제(?)에 사랑을 하고 있다.
나이 든 하급 관리인 마카르 제부시킨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부모 없이 혼자 지내고 있는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덕에 마카르는 옷도 팔고 월급도 가불 받고 방도 옮기면서 바르바라를 돕는 모양이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를 가까이에 두려고 하고 병원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갖고 계신 물건을 죄다 팔고 빚까지 잔뜩 짊어져서 하숙집 주인 마나님한테 날마다 싫은 소리를 듣고 계신다고요. 하지만 그런 사실을 저한테 숨긴 것이 오히려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떠안은 불행의 원인이 바로 저라는 것을요. 당신은 제가 그 사실을 모르도록 하셨지만, 오히려 저는 그 때문에 몇 배나 더 큰 괴로움과 슬픔을 겪고 있답니다.
마카르를 사랑하는 바르바라는 또 나름 선량하고 연약하다.(차라리 마카르의 등골을 빼먹는 악녀였으면 좋았을 것을) 삯바느질로 받은 얼마간의 푼돈을 마카르에게 돌려보내주기까지 한다.
아. 어쩌란 말이냐. 대책 없는 이 사랑!
그리하여
두 사람은 끊임없이 돈 때문에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돈 때문에 반푼이 취급을 당하는 마카르는 사랑을 하면 안 됐다.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주제에 사랑이라니.
나이 먹고 무능한 하급 관리인 마카르에게 대책 없이 감정이입을 해가지고서는 짜증을 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가난해도 빛나는 젊은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던 기억은
거짓말이다.
어디까지나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그래 보이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의 최하층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미물들에게는 사랑 따위
개나 줘버릴 무언가다.
하지만
정말 이 사회에서,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존엄한 인간으로 살기란 불가능할까?
서글프다.
늙어서, 돈 없어서,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서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