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by 궁금하다

금요일부터였던 것 같다.

목구녕이 따끔거리기 시작하더니 퇴근할 때쯤에는 식은땀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몹시 춥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이 더위에 이불속이 좋다니' 하고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이불속에서 계속 꿈틀대다가 주말을 다 보냈다.

출근을 앞두고 코로나 검사 키트로 자가 검사를 했더니 역시 양성. 하아.

그러면 나는 감염병 환자니까 갑자기 또 격리다. 나의 루틴, 일상에서 갑자기 벗어난 느낌? 뭐 물론 코로나가 한창일 때와는 다르지만, 그리고 마침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자마자 '퍼펙트 데이즈'라니 뭔가 의미 심장하지 않은가?

방구석에서 마누라님이 넣어주는 밥을 먹고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내일 아침 출근을 못하겠다고 마음먹은 직후,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 말이다.


야쿠쇼 코지라는 일본 배우, 이런저런 영화에서 얼굴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옛날에 엄청 가슴 설레며 봤던 '쉘 위 댄스'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화장실 청소부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로 재즈를 듣고,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읽는다. 말이 없어서 더 뭔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극 중 이름은 히라야마다.


히라야마에게 일상 또는 루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안정감이랄지 안온함이랄지 그런 게 아닐까? 어스름한 아침의 한줄기 빛 속에서 차례로 소지품을 챙겨 문을 나서는 히라야마는 엷은 미소를 띠며 하루를 시작한다. 변하지 않는 안정감,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까닭에 금방 익숙해진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의 시작, 익숙하고 지겹지만 또한 안온하다. 영화 속에서 연한 미소로 하루를 시작하는 히라야마는 그런 일상 또는 루틴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자동적으로 하루는 시작되고 또 그저 그런 하루가 지속되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이다. 그의 희미한 미소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루틴은 지켜져야 한다.

매일 아침 동네 늙은이의 빗자루 소리에 일어나서 화분에 물을 주고 양치를 한 후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마신다. 청소장비를 실은 조그만 차를 타고 이곳저곳의 화장실로 출동, 매일 가는 길 그리고 그 길에 흐르는 음악(적당한 레트로 풍의 음악은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같다). 매일 반복되지만 어떤 날은 화장실 청소 동료인 타카시가 여자 친구를 데려오기도 하고 그 여자 친구에게 뽀뽀를 받은 후 슬쩍 좋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뿐.

어떤 날은 조카아이가 가출을 해서 히라야마의 집에 왔다. 청소에 따라다니고 매일 점심 샌드위치를 먹던 곳에 둘이 함께 가서 점심을 먹고 동네 목욕탕을 가고 집에 와서는 조카를 돌려보낸다. 그렇지만 그뿐.

또 어떤 날은 타카시가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하루종일 청소하느라고 진이 빠질 정도다. 그래서 퇴근하고 하던 루틴을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자주 가던 동네 선술집 여주인이 모르는 어떤 남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강가에서 맥주를 마신다. 거기서 여주인의 전남편이라는 남자와 속 이야기도 하게 되지만, 그뿐이다. 히라야마는 악착같이 일상으로 돌아온다.

히라야마에게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일상이고 루틴이다. 그는 어찌 됐든 지금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지금의 일상은 마치 최후의 보루 같은 느낌이다.

그런 만큼 그런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두려움이요 공포가 된다. 히라야마가 밤마다 흑백으로 꾸는 꿈(짧은 이미지들)은 그런 공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지금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니까 말이다. 히라야마는 일상을 지겨워하면서도 '이게 어떻게 얻은 루틴인데...'하면서 그에 매달리고 또 매달리는 것이다.

영화에서 히라야마는 비밀이 있는 남자다.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조카를 찾으러 온 누이와 이별하는 모습이나 자기 전에 포크너의 소설을 읽는 것은 범상치 않다.(나는 포크너의 소설을 읽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잠들기 전에 누워서 읽기에는 고통스러운 소설일 텐데...) 그런 그는 뭔가 큰 고통을 겪고 겨우 이제 일상의 루틴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것이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영화의 말미

출근 장면, 평소처럼 일어나고 커피를 마신 후 나서는 붉게 물든 새벽의 출근길.

음악은 흐르고 운전대를 잡은 히라야마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표정, 웃는 눈에 눈물이 고인 그 표정.

인생 뭐 있냐 싶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도대체 퍼펙트 데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싶기도 하고

그냥 보통날이야말로 퍼펙트 데이인가? 싶기도 하고


지구인이라면 모두 겪을 일상의 모습을, 일본의 중년 남자 모습으로 보여주는 독일 감독

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국의 어느 중년 남자.


사람 다 거기서 거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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