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엔, 수수께끼 같은 소설
내성적인 아이와 상담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한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학교 생활에서 누군가와 껄끄러운 일이 생겼나?
뭔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물어도 대답이 없다. 불러서 옆에 앉혀 놓고 물어도 한참 있다가 예, 아니오로 답할 뿐이다.
그러면 나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조바심이 나고 짜증이 나서 부모에게 전화를 한다.
부모님이 뭐라 뭐라 하지만 속 시원하지는 않다. 그냥 그런 갑다 할 뿐이다.
나(필렌츠)에게는 어렸을 적 친구가 하나 있다. 요아힘 말케.
한 살이 더 많은 아이이고 행동과 외모가 특별한 탓에(드라이버나 성모상 등을 목에 매달고 다니고 울대뼈와 성기가 유난히 크다)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는 눈에 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는 친구들 사이의 옛날이야기다. 1940년대 2차 대전이 한창인 독일이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또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난파선으로 잠수를 하며 논다. 말케는 그중 발군의 실력으로 여러 물건을 꺼내 오기도 하고 난파선에 자신의 아지트를 만들기도 한다(그런 점은 아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전시인 만큼, 학교에서는 수차례 전쟁 영웅들의 강연이 있었고, 말케는 그중 어느 졸업생 해군 장교의 훈장을 훔친다(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때문에 말케는 학교에서 쫓겨나 전학을 간다. 이후 전차부대의 하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운 말케. 모교에서 강연을 원하지만 교장의 반대로 강연을 할 수 없었고 교장을 폭행하기에 이른다. 다시 난파선으로 헤엄쳐 간 말케.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기억나는 전체 줄거리다.
그런데 왜 제목은 고양이와 쥐인가?
내 친구 요아힘 말케 이야기인데 왜 고양이와 쥐인가?
2. 나중엔,
아, 이건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
소설에서 고양이와 쥐에 관해, 간간히 언급하고 있다.
말케의 울대뼈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웠으므로. 관리인의 검은 고양이는 나와 말케 사이에서 몸을 웅크려 뛸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삼각구도를 이뤘다. 내 이는 침묵했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말케의 울대뼈가 고양이에게 쥐가 되었으므로, 고양이는 그처럼 어렸고, 말케의 것은 그처럼 잘 움직였다. 어쨌든 고양이는 말케의 후두에 뛰어올랐다. 우리 중 누군가 고양이를 들어 말케의 목에 올려놓았던가. 아니면 이가 아팠거나 그렇지 않았던 내가, 고양이를 들어 올려 말케의 쥐를 주여 주었던가. 그리고 요아힘 말케는 비명을 질렀으나, 대수롭지 않은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가 학교나 해수욕장에 불룩한 빵봉지를 들고 다니며 수업 중이나 수영을 시작하기 직전에 마가린 바른 빵을 먹어치운다는 것도 쥐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에 불과하다. 왜냐면 쥐는 함께 빵을 씹으면서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잠깐! 처음부터 얘기할 거면, 하인리히 엘러스 광장에서 한 슐락발 경기부터 시작해야지. 그러니까 이랬는데요. 저희는 납작하게 누워 있고 말케는 졸고 있었거든요. 그때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말케의 목을 향해 잔디밭을 살금살금 가로질러 와서는, 그 친구 목을 바라보더니, 저기 펄쩍펄쩍 뛰는 저걸 쥐라고 생각하고 뛰어오르는데……
무슨 말이야, 필렌츠가 고양이를 잡아 올려놨잖아?
누가 내게 좋은 결말을 써주려나? 고양이와 쥐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 갈대로 둘러싸인 웅덩이의 뿔논병아리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자연을 피하면 문화영화가 내게 이 솜씨 좋은 물새를 보여준다. 아니면 주간뉴스가 라인강에서 침몰한 화물선의 인양 작업이나, 함부르크 항구에서의 수중 작업을 취재했다. 호발트 조선소 옆의 벙커가 폭파되고, 블록버스터 폭탄이 제거되었다는 내용이다. 약간 찌그러진, 반짝거리는 헬멧을 쓴 남자들이 물속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는 팔을 뻗어 헬멧의 나사를 돌리고, 그들은 잠수용 헬멧을 벗는다. 그러나 위대한 말케는 결코 깜빡이는 영사막 위에서 담뱃불을 붙이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늘 다른 사람들이다.
1959년 10월에 너처럼 기사십자철십자장을 받은 생존자들의 모임이 있다기에 레겐스부르크에 갔던 일도 이야기해야 할까? 그들은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안에서 독일연방군의 군악대가 연주를 하거나 잠깐 쉬곤 했다. 나는 출입을 관리하는 소위에게 휴식시간을 틈타 무대에서 너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말케 하사관, 입구에 면회 있다!” 그러나 너는 어둠 속에서 떠오르려 하지 지 않았다.
아마도 쥐는 독특한 울대뼈의 소유자 말케
그럼 고양이는 뭐람?
고양이는 제도와 사회 체제, 시대를 생각하면 나치의 전체주의 같은 것. 고양이는 쥐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사회제도는 쥐를 공격하는 무언가가 되고 말케는 전체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개인이 된다.
이 소설의 해설에서 박경희는
세상을 비웃으며 단호하게 성장을 거부한 양철북의 오스카와 달리, 말케는 부끄러움을 피해 하루라도 빨리 미래로 도달하고자 한다. 그 미래는 오스카가 거부한 성인의 세계다. 그렇게 성인 사계의 서막을 알리는 '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워' 살아 있는 쥐처럼 보이는 그의 '치명적인 연골'은 살아 있는 고양이들을 유인한다.
충격과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말케를 회상하며, 서술자인 필렌츠는 섬뜩하리만치 무심하게 말한다. 요아힘 말케는 '대수롭지 않은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고양이의 교활한 공격을 기점으로 집단은 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말케는 반대로 집단에 순응하기 위한 이중적인 싸움을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의 출처인 울대뼈를 가리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상할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무리의 대장인 동시에 무리로부터 도망치는 자"가 되어간다.
귄터 그라스는 6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고양이와 쥐'의 이야기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서술자가 되는' 필렌츠의 죄책감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인터뷰에서는 '단치히 3부작'에 등장하는 세 명의 1인칭 서술자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모두 죄책감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반세기가 지난 2006년에 그는 자전적 소설 '양파껍질을 벗기며'의 출간을 앞두고 돌연 종전 무렵 자신이 나치 친위대에 입대했던 전력을 털어놓아 전 세계 독자들을 혼란과 충격에 빠뜨렸다. 독일 전후문학의 대표하는 작가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받아온 그라스가 나치당의 배지를 삼킨 오스카의 아버지 마체라트나 울대뼈를 가리려던 말케처럼 과거를 감추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두고 '너무 늦은 고백'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대작가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과 신랄한 비판이 뒤따랐다.
아. 작가는 부끄러웠구나.
나치에 협력했다는 부끄러움. 우리로 치면 일제나 군부 독재에 부역한 정도로 치면 될 것 같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부끄러움이다. 사회의 양심으로 불렸던 사람의 심층에는 치명적인 부끄러움이 늘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해야 하고 말하고 싶고 부끄러웠지만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수수께끼가 되었던 거다.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인 말케는 울대뼈라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고
나치에 부역했던(비록 직접적인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작가는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평생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한다.(나처럼)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나이는 또 오죽 답답했을까?(귄터 그라스처럼)
수수께끼와 같았던 소설, 고양이와 쥐.
용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