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한강)

by 궁금하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한강'이라는 작가가 주는 아우라가 있다.

고민거리를 주고

고통스럽지만 또 그만큼 읽은 보람을 주는...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에 '작별'이라는 한강의 단편을 읽었을 때

그 요즘 말로 '아련 돋는다'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아. 신기하구먼'했었던 느낌이 떠올랐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집 앞 산책로에 나가 담배를 피우면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괴랄할 정도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한강이라는 소설가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역사적 사건

제주 사람들이 겪은 4.3 사건을 소설가는 이렇게 소설로 쓰는구나.(사회적 사건의 기록을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으로) 싶었다.


광주를

그리고 제주도를

이렇게 그려낸 이 소설가는 또 어떤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고통과 함께 하면 삶을 어떻게 살지?


평생 남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죽을 팔자 아닌가?


감정이 너무 급발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신형철)는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마치 모의고사 문제 해설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강은 하게 만든다.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에도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고 믿게 된다.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제주에서 경산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반세기를 넘긴다.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은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언젠가부터 그의 새 소설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이 된다.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초반부에 경하(소설가 나)는 손가락이 잘린 인선을 위해 제주의 인선네 집으로 간다.

경하(매번 유서를 고쳐 쓰고 육체적인 고통(편두통, 위궤양 같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는 폭설이 내리는, 교통이 두절된 제주로 가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인선네 집을 찾아간다. 인선이 키우는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하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이유.

경하는 고통 속에 인선네 집에 도착하고 앵무새의 죽음을 발견한 후 실제인지 환상인지 인선과 대화하며

제주의 이야기를 느낀다.(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제목의 이유와 경하의 여정의 이유는 평론가의 이야기에서 간신히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명확한 사건의 전개를 통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서 쉽지는 않았고 읽는 내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물 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라고 소설 본문에 쓰여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한강'인가? 에서부터)


또한

지난한 고통을 겪은 인선의 어머니에 대해서 작가가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라고 한 부분도 약간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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