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출생 연도는 1932년, 사망 연도는 2016년.
한 때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고 불리던 '장미의 이름'을 쓴 작가.
그리고 장미의 이름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숀 코너리가 셜록 홈즈 뺨치는 수도사 역을 맡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
오크통 속에 처박혀 두 다리만 허공을 향해 있는 장면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때 소설 '장미의 이름'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터라 이번에도 기대가 컸다.
수도사 옷을 입은 007(?)
이야기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1992년의 밀라노를 배경으로 하여, 존재하지 않는, 또는 실제로 창간되지 않을 신문의 창간준비호를 만드는 언론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 콜론나는 유령 작가(또는 대필 작가)로 먹고사는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시메이라는 사람의 요청으로 새로 창간하게 될 신문의 데스크로 근무하게 된다.(데스크는 사실 겉으로 드러난 역할이며 실제로는 시메이의 회고록을 작성하는 역할이다) 사주의 이익을 목적으로 설립되는 이 언론사에서 시메이는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기사를 쓰도록 기자들을 종용한다. 주인공은 시메이의 일들을 기록하는 회고록의 작가이자 겉으로는 창간 예정 언론사의 데스크인 셈이다. 각종 저질, 혹은 가짜 뉴스들을 만드는 작업에 주인공은 지쳐간다. 그러던 중 회사의 기자 중 한 명인 브라가도초가 콜론나를 따로 불러 무솔리니와 관련된 음모론을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피살되고 만다. 신문은 발행이 중단되고 시메이와 주인공 콜론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이 소설.
요런 식이다.
작가는 중간에 '마이아'라는 여기자와의 연애 이야기도 살짝 버무리고 92년 6월 6일에 시작해서 두 달 전 4월로 되돌아가서 다시 6월 11일로 끝나는 스릴러적 구성.
그리고 언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도 넣었다.
여기에서 작가가 <에메랄드빛 양말>을 강조하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벌어진 우스꽝스러운 일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되어 있는 1992년보다 훨씬 뒤인 2009년에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 최대의 출판업체인 몬다도리의 최대 주주가 되기 위해 중재를 맡은 판사에게 뇌물을 주었던 일이 드러남으로써 재심에서 경쟁 주주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카날레 5>라는 TV방송에 지시하여 그 판결을 내린 라이몬도 메시아노 판사를 미행하면서 몰래 촬영하게 했다. 이 몰래카메라 장면을 방송하면서 내레이터는 판사의 행동이 <기이하다>고 말했다. 담배 피우는 장면에서는 <몇 개비째인지 모를> 담배를 잇따라 피운다고 했고, 터키옥 빛깔의 양말을 보여 줄 때는 그 취향이 <이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메시지가 마음에 안 들면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요즘 언론의 모습.
거의 30년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 언론, 유튜브 저널리즘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의 모습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바다.
이제 사람들은 언론이 정의롭기를, 또는 언론을 향해 진실과 정의를 요구하는 것을 하지는 않는다.(너무 냉소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즉, 에코가 무슨 대단한 비밀인 양 털어놓는 언론의 실체는 이미 모든 대중들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게다가
<휴대전화 사업은 길게 가지 못할 겁니다.> 시메이가 반박했다. <첫째, 그 가격이 엄청 비싼 터라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요. 둘째,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이런 점을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휴대전화로 누구하고든 아무 때나 통화한다는 게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고, 한 달 이 지날 때마다 유행을 탄대 해도 기껏해야 한두 해 반짝하다 말지 않겠어요? 요즘에 휴대전화가 누구에게 쓸모가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저 바람난 유부남들이나 쓰는 거예요. 그들은 집 전화를 쓰지 않고도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 아니면 수도를 설치하고 보수하는 기술자들에게도 아마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런 기술자들은 작업장으로 옮겨 가는 중에도 전화를 받을 수 있으면 좋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쓸모가 없어요. 우리 독자들은 대부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것에 관한 기사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휴대전화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도 기사에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런 기사를 좋게 생각하기는커녕 우리를 상류층 흉내 내는 속물이나 과도하게 앞서가며 잘난 척하는 자들로 여길지도 모르지요.>
하는 작가의 시대착오적인 모습.
문학적으로 가치를 논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고
내가 이 소설을 읽은 시기도
소설과 맞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