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갈래라고 했던가?
분명히 거짓부렁인 이야기인데 우리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현실을 드러내는 그 허구의 이야기들은 밝고 명랑하기가 어렵다.
왜냐면 현실이야말로 부조리의 세계, 그 자체니까.
김유담의 이 소설들(8개의 단편들)도 무척 씁쓸하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집의 말미(해설)에서 평론가는 질문한다.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주로 지방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 '출신'의 여성 화자들이다. 그녀들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없는 곳으로 향하기를 열망하며 고향을 떠난다. 이들에게 있어 고향과 가족을 떠나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나 아닐 수 있는 가능성들의 집합소로 스스로의 존재를 이전하는 필사적인 행위에 가깝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한 가족의 곁을 벗어나 머나먼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겠다고 다짐해 온 여자아이들은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을 떠나는 데 성공한다. 안간힘을 다 해서,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큰 부담을 지운다는 사실도 애써 모른 체하며 떠나온 그녀들은 자신이 도달한 곳에서 그토록 원하던 바대로 새로운 조건 위에 올라설 수 있을까, '출신'의 흔적을 지워내고 완전히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여자아이들은 빛나는 성취를 이룩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래서?
삶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인데?
소설의 주인공들은 원래 그런 것을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느냐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현실들을 인정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모습.
이것은 어른의 모습이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구질구질한데도 불구하고 그리 구질구질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 몸부림치고 있다.
'핀 캐리'에서 오빠는 볼링에 미친 듯이 빠져 있었고
'탬버린'에서 '송'은 탬버린에 혼을 담는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 애새키들처럼 징징대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물들.
'탬버린'에서
나(주인공)가 간신히 입사한 회사의 사장은 노래방 점수 백점에 상금을 건다.
모두들 노력하는 와중에 나(주인공)에게도 차례가 왔다. 그녀는 99점, 97점. 아쉽게도 백점을 받지 못한다.
사장은 계속 도전할 것을 강요하고 사람들도 어느덧 그 분위기에 젖어 버렸다.
구토할 것 같은 상황.
강요와 억압의 분위기에서 그녀는 한 번 더 노래를 하고 백점을 받는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송에게 연락한다.
안녕, 송? 나 은수. 오랜만이야.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송을 만나게 된다면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송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아무런 사진도, 글귀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차가 드문 밤길을 달리는 버스는 거칠게 덜컹거렸다. 기사는 속도를 한껏 높였다가 정지신호에 걸릴 때마다 급 정거를 했다. 나는 버스 차체와 함께 흔들리는 휴대전화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새로 생긴 대화방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드디어 메시지 옆에 떠 있던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송이 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였다. 나는 눈에 힘을 준 채 휴대전화 화면에 집중했다. 송에게서는 아직 답이 오지 않고 있었다.
대답이 올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제 모두 어른이 되었다는 것.
어른이 되어 이 눅눅한 세상을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들 그렇다는 것.
이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