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정진영)

by 궁금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신파극, 막장 드라마를 우리는 최고의 드라마로 꼽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드라마들은 높은 시청률을 올리고 스토리는 장르물처럼 반복된다.

이 소설도 정확히 그런, 사람들의 본능적 흥미를 끄는 요소가 있다.


폭력적인 아버지, 가족들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한 아들, 외롭고 슬픈 데다가 이해받지 못하는 엄마, 그리고 비정하게도 나(주인공 범우)를 버린 여자 친구까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나(범우)는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고 그 상황에서 죽기 전에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그렇게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이다.


나(범우)는 AI로 엄마를 되살려 그것을 물으려 하고 그러자면 엄마에 대해서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작가는 설득력을 위해서 대필 작가인 나(범우)를 전자회사의 책임 연구원으로 취직시켰다. 그리고 나오는 인공 지능에 관한 설명)

나(범우)는 엄마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사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엄마는 동네에서 인정받는 소녀였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아버지는 가수가 꿈이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조사하기 위해 찾아간 아버지는 말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 말을 아버지의 목소리로 듣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게 놀랍고 낯설었다. 아버지의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세월에 장사는 없는 걸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의 어깨가 작아졌다. 내 마음속에서 원망과 안쓰러움이 교차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그런 줄 몰랐다고 한다. 나도 그때는 어렸다고 한다.

이런 흐름이다. 익숙해서 오히려 알 수 없었던, 그런 인물의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려나간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보던 줄거리다.


엄마가 자살하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에서 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5년 9월 7일 수요일

내 마음은 아침부터 우울하다. 서글프고 살아가는 게 무의미한 것 같다.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보니 눈물이 핑 돈다. 그이는 날마다 고주망태가 되어서 집에 들어온다. 나 또한 날마다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신다. 그이나 나나 모두 한심하다. 우리는 고작 이렇게 살자고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걸까.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기억하는 엄마의 최후 장면.


잠시 후 어머니가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나 이제 갈 생각인데 인사 안 할 거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술을 마시려면 똑바로 마시라고 화를 내며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나중에 봐.”

아버지는 어머니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어머니가 안방 너머 베란다에서 창밖으로 넘어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경악한 아버지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뛰었다. 아버지는 급히 베란다로 뛰다가 거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베란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머니가 창밖으로 추락한 뒤였다. 나는 아버지의 뒤늦은 고백을 듣고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아버지의 충혈된 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뺨을 타고 흘러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침내 작가는 나(범우)의 입을 빌어 말한다.

'죽은 사람의 흔적을 끌어모으며 그리워하는 일보다, 산 사람과 직접 만나 오해를 푸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라고


범우야, 범재야,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아빠같이 무식하고 난폭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해. 이 엄마가 너희들을 어찌 잊으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엄마는 범우와 범재를 너무너무 사랑해.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니. 내 너희들을 두고 어떻게 가니. 이 엄마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다.


뻔하디 뻔한 흐름이고 결국에는 헤어졌던 여자 친구에게 연락을 시도하며 소설이 끝난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무심코 떠오르는 내 어린 시절이 있다.

사이다 한 병을 먹고 싶은데 집에 돈이 없어서 온 집안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동전을 찾던 나.

그 동전으로 사이다를 사서 마시는 나를 감개 무량하게 바라보던 엄마.


아마 죽을 때까지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엄두를 못 내는 나.


어찌할 수 없게 내 머릿속에 끼어드는 상념들.


이게 이 소설 또는 문학의 가치라면 그 또한 훌륭하다고 생각이 든다.

소설 자체로 뛰어난 만듦새가 있지 않더라도, 마법처럼 사람을 홀리지 않더라도

이 또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소설로 독서 모임을 한다면

돌아가면서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 한 자락씩 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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