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by 궁금하다

이상한 일이다.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몇 년 전인지도 정확하지 않은, 일산에서 이사 다니던 시절?

그때 나는 몇 년마다 이사 다니는 것에 짜증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호구가 되는 것, 또는 호구처럼 보이는 것이 무척 두려웠다.(뭐,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사 도중이었나? 이사 후 가구를 설치하던 중이었나? 인부가 옮기던 스피커가 떨어져서 깨졌다. 이어서 나의 짜증도 폭발.

꽥꽥 소리를 지르는 비척 마른 남자,

미안한지, 미안하지 않은지 모르겠는 사과를 하는 건장한 남자 둘.

적당히 책장 하나를 받고 합의를 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젊은 인부가 책장을 가져와서 주고 갔다. 무표정하고 건조한 얼굴.

나는 처와 아이 앞에서 무기력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부끄럽고 참담한 개인의 역사.

이 소설을 읽고 불현듯 떠올랐다.


왜일까?


이 단편 소설집(모두 아홉 편)의 주인공들 때문일까?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법한 인물들이다.

<세상의 모든 바다>에는 덕질하는 오덕후,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노처녀, <전조등>에서는 적당히 취업하고 결혼하는 남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다문화 남 학생, 가난한 집 여학생, <보편 교양>에서는 적당히 소심한 국어 선생, <로나, 우리의 별>에서는 록스타를 따르는 팬들(외다리 비둘기, 아로미, 제플린88, 똑딱이단추,......), <태엽은 12와 1/2바퀴>에서는 양양의 펜션 주인 영감(다 큰 딸을 추억하는), <무겁고 높은>에서는 역도하는 소녀, <팍스 아토미카>에서는 강박증 환자가 나온다.

모두 희귀한 사람들이 아니고 희귀한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책을 다 읽은 후 그들 모두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척 재미있게 술술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다니


책을 다시 훑어보면서 그중 애착이 가는 한 아이.

<무겁고 높은>에서 역도 소녀 '송희'는

현재는 카지노로 먹고살고 과거에는 탄광촌 이었던 곳에서 평범한 아버지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속은 없다.

그녀는 술 먹은 아버지를 옮기며 아버지의 무게를 가늠하고 중2 때 역도를 시작했다.


소각장에 가려다 괜히 샛길로 들어섰던 날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것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히는 소리. 역도장 문은 열려 있었다. 훈련 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다부진 몸의 아이들이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바벨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려놓는다기보다는, 내던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도에 내려놓는 동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었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버려보고 싶어서 역도를 시작한 송희는 100킬로그램을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100킬로는 대회 입상이 가능한 무게도 아니다) 송희는 마지막 대회에서도 그 무게를 들지 못하고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의 역도장에서 다시 한번 도전.(아이구, 이것아. 왠지 연민이 느껴지지만 또 그렇게 불쌍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모두 이렇게들 산다.

하잘 것 없지만

남들에게는 대단할 것도 없고, 관심도 없겠지만

각자 모두 자기만의 역사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런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장삼이사에 대한 위로(?) 같은 느낌을 준다.

잘난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의 점잖은 위로 같은 것이 아니라 불행에 빠지고도 열심히 헤쳐 나오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나 스스로 받는 위로(?) 같은 것.

그리고 그런 위로 앞에서 나는 내 부끄러움의 역사를 주절주절 늘어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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