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보이는 중요한 노래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 흐름 속에서 모두 그렇다.
이 노래는 마치 스위치와 같다.
하루를 마치고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몽롱한 꿈에서 깨어나는 새벽에 형광등을 켜고 할 때 그 스위치 말이다.
그런데 이 스위치는 전류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이 스위치는 슬픔을 동반한다.
오, 대니보이, 피리소리 울리네
산골짜기에도, 산기슭에도
여름은 지나가고, 꽃들도 다 지니
너는 떠나야만 하고, 나는 남아야 하네
.......
네가 돌아왔을 때, 꽃도 지고
나마저도 죽었다면
나 누운 곳에 찾아와
날 위해서 돌아왔다고 말해다오.
.......
아일랜드에서 불렸던 민요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아리랑 비슷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애잔하다.
한 세계와 이별하는 순간,
번개가 치듯 갑자기 이별의 순간임을 깨달았을 때, 주인공인 '나'는 그 운명적 슬픔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뭐랄까? 주인공의 처지가 참 안되었다는 측은한 마음이 인다.
그래서 또, 소설 속에 이 노래가 등장하는 그 순간, 강렬하게 그 노래가 내 뇌리에 재생된다.(물론 유튜브의 반복 재생으로)
이 소설은 길다.
두 권에 걸쳐서 거의 700페이지에 육박한다.(김난주 옮김, 민음사 판)
게다가 초반에 약간(아주 약간)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각 장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는 점이다. 홀수장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야기이고, 짝수장은 '세계의 끝' 이야기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007 같은 첩보물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하드보일드하게도. '계산사'(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데이터 전문가 정도?)로 활동하는 '나', 어느 천재 과학자의 의뢰를 수락하며 악당들과 얽히게 되는 이야기이다. 계산사의 '조직'과 기호사(이것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컴퓨터 해킹능력자 집단?)의 '공장'이 대립하고 천재 과학자의 손녀인 분홍 소녀와 함께 모험에 휘말린다. 그리고는 과학자가 선물로 준 일각수의 뼈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도서관의 사서와 관계를 맺는다. 스타일리시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재치 있는 문체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과 달리, 잠은 2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밤 10시에 분홍색 슈트를 입은 통통한 여자가 찾아와 내 어깨를 흔든 것이다. 아무래도 내 잠은 아주 헐값에 경매에 나온 모양이다. 모두 차례대로 찾아와, 중고차의 타이어 상태를 확인하듯 내 잠을 걷어찬다. 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낡기는 했어도 중고차는 아니다.
“좀 내버려 둬.”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면서 그녀는 주먹으로 내 옆구리를 퍽퍽 쳤다. 지옥의 뚜껑이 열리는 듯한 격통이 내 몸을 관통했다.
반면 '세계의 끝' 이야기에서는 '마을'로 들어오며 자신의 그림자와 헤어지게 된 '나'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게 된 풍경과 '나'가 일하게 된 도서관의 사서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림자를 끌고 다녔다.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문지기에게 내 그림자를 내줘야만 했다.
“그걸 몸에 걸친 채 마을에 들어갈 수는 없어.” 문지기가 말했다. “그림자를 버리든, 안에 들어가는 걸 포기하든, 둘 중 하나야.”
나는 그림자를 버렸다.
문지기는 나를 문 옆에 있는 공터에 세웠다. 오후 3시의 태양이 내 그림자를 또렷이 지면에 그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리고 문지기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예리한 칼날을 그림자와 지면 사이에 밀어 넣고, 좌우로 몇 번 흔들어 자리를 잡고서 그림자를 지면에서 깔끔하게 떼어 내었다.
그림자는 저항하듯이 아주 잠깐 몸을 떨었지만, 결국 지면에서 떼어져 힘을 잃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하고 지친 듯 보였다.
그래서 한 이야기에 막 집중하려는 찰나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 때문에 약간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언뜻 전혀 달라 보이던 두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조금씩 빌드업되는 이 과정이 약간 지루할 수 있겠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천재 노과학자가 '나'를 이용해 무의식 속에 데이터를 암호화하는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데이터 암호화의 열쇠가 '세계의 끝'이라는 낱말이었다. 결국 두 이야기는 한 인물('나'의 현실과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이고 '나'의 무의식 속에 '세계의 끝'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세계의 끝' 마을에서 도망쳐서 그곳을 벗어나게 되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계의 끝'에 남으면 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뭐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그 죽음과 선택의 순간에 흘러나오는 바로 '대니보이'
이곳에서는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싸우지도 않아. 생활은 소박하지만 나름 충실하고, 다들 평등해. 험담을 하는 사람도 없고, 뭔가를 서로 빼앗지도 않아. 노동은 해도, 모두 자신의 노동을 즐기고 있어. 그건 노동을 위한 순수한 노동일뿐, 누가 강제로 시키거나 싫은데 억지고 하는 게 아니야. 남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지. 한탄할 일도 없고 고뇌할 일도 없어.
마침내 '나'와 그림자는 마을에서 도망치는 것에 대해 언쟁을 벌이고 그림자는 '나'를 설득한다.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고.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이 마을에 싸움도 증오도 욕망도 없다고 했어. 그건 아주 좋은 일이지.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나 싸움과 증오나 욕망이 없다는 건, 즉 그 반대도 없다는 뜻이야. 기쁨과 축복과 애정 같은 거 말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생겨날 수 있는 거라고. 절망이 없는 축복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그리고 물론 애정도 그래. 네가 말하는 그 도서관 여자를 생각해 봐. 너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기분은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왜냐, 그녀에게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마음이 없는 인간은 걸어 다니는 환영에 불과해. 그런 걸 취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너는 그런 영원한 생활을 원하는 거야? 너 자신까지 그런 환영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도 그들처럼 영원히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하지만 최종적으로 '나'는 마음을 가진 채로 세계의 끝에 남기로 선택한다. 마음을 지닌 자들이 쫓겨나는 마을 외곽 숲으로 가더라도, 자신이 마음을 찾아준 도서관 사서와 함께
나는 이런 이야기의 흐름이 바로 인간의 팔자처럼 느껴져서 무척 애잔했던 것 같다.
완벽한 고요를 추구하지만 인간으로서 지지고 볶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
카뮈 형이 시지푸스처럼 살아보라고 큰소리쳤지만 어디 보통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그냥 뭐 이렇게 살아야지. 그리고 그게 맞지.
그래서 이 소설 속에 대니보이는 더욱 코끝이 시린 느낌이 있다.
p.s. 이 소설은 1985년 하루키가 30대 중반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 젊은 나이에 이런 작품이라니.....
대단히 대단한 작가. 감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