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람을 사귈 때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사람을 창조해서 그를 사귀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내가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를 거침없이 하는 녀석이 있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한 외모, 성장 배경, 경제적 형편 등등,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게 왠지 모르게 위화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위화감, 열등감,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녀석은 나랑 친하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통할 수 있는 또 다른 그 녀석을 만들어 낸다.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그 녀석.
그렇지만 여러 가지로 다른, 그 녀석의 실체와 만나는 것에는 품이 많이 든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 녀석의 반응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하고 함께 한 이후에 남는 것은 피로감, 허무함 같은 것들이다.
그야말로 '연극이 끝나고 난 뒤'가 되는 것이다.
내 마음속의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실체 사이에 벌어진 간격,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귐이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에 나오는 클라이브와 버넌 그리고 나머지 인간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대가 완전히 내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만족하는 인간의 이기성. 상대를 발밑에 두려는 권력욕, 자신에 대한 합리화.
젊었을 때 각기 몰리(사진가이자 평론가였던)의 연인이었으며 오랜 친구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망할 조지(몰리가 병증이 심할 때의 동거인) 때문에 병문안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간 몰리를 애도하고 자신들도 몰리처럼(몰리는 아마도 치매 같은 질병인 듯) 엉망이 되면 안락사가 허용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가 주기를 서로 약속한다.(여기서부터 클라이브는 자신의 심각한 걱정을 무심히 듣고 간단히 약속해 버리는 버넌에게 빈정이 상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버넌에게 클라이브는 굳이 방문을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안락사를 부탁한다. 그리고 무심하게 그 말을 듣던 버넌은 다시 바쁜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돌아간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 클라이브 딴에는 진지한 삶의 고민인데 버넌은 아주 바쁜 것이다.)
버넌이 한 거라곤 갈겨쓴 쪽지 한 장을 문틈에 틀어박은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뭐랄까…… 언제나 두 사람의 우정을 지배하던 전형적인 불균형의 상징인지도 몰랐다. 클라이브의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해 왔지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어 한사코 떨쳐내려던 느낌. 지금까지는.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우정은 분명 한편으로 기울어 있었고, 어제저녁 같은 의견 대립도 그리 놀랄 게 없었다.
예를 들어, 오래전 일이지만 버넌이 일 년 가까이 방세 한 푼 내지 않고 클라이브의 집에 얹혀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뿐인가. 수년 동안 음악을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 오락거리를 제공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버넌이 아니라 클라이브였다.
그리고 며칠 후, 뜻하지 않게 버넌의 손에 들어온 사진 한 장.(조지가 몰리의 유품 속에서 찾은 듯) 사진 속의 인물은 장례식에 나타났던 몰리의 연인이며, 총리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다.(가머니는 클라이브와 버넌 모두가 진저리를 치는 보수당의 인물) 복장도착의 취향을 드러내는 그 사진은 가머니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의 정치생명을 한 방에 골로 보낼 사진이었고, 버넌은 자기가 일하는 신문 <저지>에서 공개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클라이브와 버넌, 둘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한다. 버넌은 공공의 이익을 앞세워 신문사의 경영위기를 돌파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고자 하고, 클라이브는 죽은 몰리까지 모욕하는 데다가 공익활동과 무관한 개인의 사생활일 뿐이라며 버넌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클라이브도 작곡의 영감을 얻기 위한 산행 중에 곤경에 처한 눈앞의 여성을 모른 척한다. 여성을 괴롭히는 남자를 보았지만 마침 그때 작곡의 영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로를 극단적으로 비난하던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결국 증오와 복수심뿐이다. 우정은 한 줌 연기처럼 사라지고 몰리의 연인이었던 네 사나이(클라이브, 버넌, 조지, 가머니)는 결국 모두 쓰레기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 초반부에서 안락사가 가능한 합리적 도시 암스테르담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암살하고자 하는 무대가 된다.
무례한 놈! 클라이브는 지금껏 친구라고 착각해 온 더러운 자식에게 보낼 편지를 머릿속으로 써보았다. 메스껍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 냉소적인 체하며 뒤로 계략을 꾸미는 야비한 속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수동공격성. 버넌 핼리데이? 버러지 핼리데이!....... 가머니처럼 약점 많은 바보들이나 파멸시키며 황색신문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 이게 특히 기가 막히는 부분인데 — 자신은 본인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는 미쳤다. 환자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클라이브의 버넌에 대한 독설)
이 결정을 뒷받침해 준 것은 세상이 자신을 홀대하고 자신의 삶이 유린당하는 와중에 누구보다도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 옛 친구라는 사실,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버넌의 판단이었다. 클라이브는 미쳤다. 떳떳지 못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종종 복수심이 책임감과 효과적으로 결합하곤 한다. 몇 시간이 흐르고 버넌은 <저지>에 실린 네덜란드 의료계의 스캔들을 거듭 상세히 읽었다. 오후에는 전화를 걸어 개인적으로 몇 가지 사항을 문의하기도 했다. 버넌은 부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몇 시간을 빈둥거리며 난파한 자신의 미래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암스테르담으로 초대(클라이브의 교향곡 발표 기념 리셉션) 받으려면 클라이브에게 전화를 걸어 화해를 청하는 체해야 할까.(버넌의 클라이브에 대한 증오)
서로를 저주하는 수십 년 지기.
사람들이 맺는 인간관계란 얼마나 연약한가?
서로의 동의와 지지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그러지 않을 때, 인간은 얼마나 순식간에 변하고 마는가?
믿었던 친구가 배신했다고 여길 때(어디까지나 스스로의 관점에서) 소설 속의 두 친구는 몸서리를 치고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급류에 휩쓸리듯 서로를 향해 마주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 감정이 불붙었을 때 이성 따위는 아무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몰아치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며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작가는 1998년 이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던 날 저녁, 한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짤막한 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서너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 말이죠. 소설이란 것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독자가 구조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요. <암스테르담>을 쓰면서 가졌던 욕심은 독자와 그런 플롯을 공유하는 거였지요. 플롯 자체가 재미를 내포한, 플롯이 독자를 이끌어가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내내 일종의 연극적 형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원래 이 작품에는 희비극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고, 그래서 다섯 부로 구성되었죠. 원고에서 잘려나간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더 이상 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삭제하고 또 삭제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는 쓰레기 같은 네 인물들이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면서 종말을 향해가는 과정이 꼭 필요한 만큼 차곡차곡 쌓이고 그 끝은 폭발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각 인물들의 리얼한 면모.
하나같이 인간 말종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소설은, 시작 부분에 인용된 시구가 던진 떡밥을 충실히 회수하며 끝난다.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 향해(W.H. 오든, <십자로>)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이언 매큐언의 다른 소설을 함부로 손에 잡지는 못할 것 같다.
독서 중에 느끼는 그 초조감, 그 간질간질하면서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그 감정, 그것을 다시 느끼기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