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생각(이현승)

by 궁금하다

책의 제일 끝, 시인의 말.


할머니는 문맹이었지만, 모든 것을 아는 분이었다. 숫자를 모르지만 수를 알고 셈했으며, 글자를 모르지만 말을 알았고 마음을 읽었다. 성냥개비의 말(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방 자리 밑과 서랍 속에 있던) 앞에서는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가 문맹이었다.


여기서 할머니를 시인으로 바꾸면 어떨까?


확실히 시인들의 뇌는 소설가나 과학자들의 뇌와는 다르다 싶다.

구구한 설명(또는 알기 쉬운 설명?), 장황한 논리적 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굉장히 직관적, 이라고 할까?

세상을 바라보는 직관적인 눈.


우리의 싸움에 승자가 없는 것은

우리가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벼랑을 나눠 쓰는 이혼 법정의 부부처럼

지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던 것이다.(롤러코스터 중에서)


가령 이런 상상,

내가 버린 음식물 쓰레기가 돼지 사료가 되고

돼지들이 내 쓰레기 속의 유리 조각을 삼키는.(일생일대의 상상 중에서)


주로 날고 가끔 걷는 새들도 비웃을 만큼 걸었는데,

나는 이미 아문센만큼 걸은 것 같고

이번엔 북극에서의 아문센보다 막막해 있다.

어쩌다가 나는 남극에 와서 헤매고 있는가?(여행자 중에서)


웃는 건 니 마음이지만

웃기는 일, 우습게 보지 마라.

나 전유성이다.

내가 웬만하면 안 웃기는 건,

직업이니까 관리하는 거다.(전유성 중에서)


퇴근길에 보는 어둠은 거대한 동굴 같다.

불행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생각,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단 한걸음이면 우리는 벌써 도착한다.(씽크홀 중에서)


전반적으로 시인에게 세상은 고통인 것 같고, 시인은 그 고통의 이야기들 속에서 한 장의 스냅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나는

저번 주에 도서관 앞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

그중에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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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하나뿐인 비둘기, 깨금발로 폴짝대며 간다.


이런 사진 한 장.

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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