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문턱 근처에서

어제 나는 한 출판사 대표를 만났다. 미팅을 마치고 곧장 인사동의 목시 호텔로 이동해 체크인을 했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잠시 아무 데에도 초점을 두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멍한 시선 끝에 걸린 노트북을 열어 <Delusional projection and Final Reclaim> 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Offing에서는 꽤나 encouragement rejection이 왔기에, 간결함을 목표로 문장들을 덜어내고 다듬었다.

잉여의 감정을 깎아내고 나니 비로소 글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정리를 마치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전시장 대신 미술책방으로 발걸음이 먼저 향했다.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오래 머물며 책들을 읽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처럼 프랑스 감독 형제의 시나리오 관련 책이었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다르덴 형제의 작업기였을 것이다.

그들의 영화는 언제나 가난과 노동, 일상의 곤궁을 다루지만 결코 연민이나 미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등장인물을 구원하려 들지 않고, 음악은 관객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 비극을 드라마로 키우지 않고 인물을 도덕적 상징으로 박제하지도 않는다. 삶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태도로, 그저 묵묵히 끝까지 따라간다. 나는 그 무표정한 정직함을 오래 좋아해왔다.


결국 전시는 보지 않았다. 테라로사에 들어가 오트 밀크 라테를 주문했지만 끝까지 마시지 못했다. 대신 저녁으로 먹을 샐러드를 하나 사기로 마음먹었다. 안국역 쪽으로 걸어가다 인사동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밀려 들어간 기념품 가게에서, 주인은 내게 몇 번이나 물었다.


“Are you Korean? (한국 사람이세요?)”

나는 이 질문을 꽤 자주 듣는다.


술을 끊은 뒤로 내 몸은 분명히 가벼워졌다. 이번 생일은 이상하리만큼 충만했다. 어떤 자기 효능감 같은 것. 잠깐 효능감 대신 혐오’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문득 질문 하나가 도착했다. 내일 커피는 어디서 마시고 싶으냐는 물음. 신경 써서 고를 힘이 없었다.

“Let’s go to the Bacha Coffee flagship. (바차 커피 플래그십으로 가자.)”라고 답했다. “I want to see the tableware. (테이블웨어를 보고 싶어.)”


그날의 대화는 끝났다.

주변이 조용해진 틈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 책의 디자인은 마크 로스코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직감.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 않는 방식. 중심을 세우지 않고 대비를 강조하지도 않는 화면. 색은 겹쳐 있지만 충돌하지 않고, 경계는 분명하지만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상태.

로스코의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무엇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오래 머물게 된다.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대신 천천히 스며든다.


나는 그런 글을 만들고 싶다. 독자가 의미를 알게 되는 책이 아니라, 어느 페이지에선가 잠시 멈추어 서게 되는 책. 감정이 주장으로 정리되기 전의 상태, 아직 언어의 형태를 갖추기 전의 진동을 그대로 남겨두는 형식.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약간 어긋난 상태로 세계를 통과해왔다. 어디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환경과 나 사이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불일치가 있었다. 글쓰기는 한국어 위에 영문법이 겹쳐진 채로 굳어 있었다. 사유의 톤은 지나치게 건조하거나, 반대로 너무 투명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온도와 맞지 않았다. 백색의 거짓말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나는 자주 그 아래 깔린 어두운 진실을 먼저 보았고, 외모의 골격 역시 어떤 범주보다 늘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이방인이 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남았다.

들어가려 했지만 완전히 맞물리지 않았고, 머물렀지만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 미세한 어긋남이 나를 밖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늘 문턱 근처에 서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그 위치는 때로 외로웠지만, 동시에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거리였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가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은 환대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있고, 보는 쪽이 스스로의 속도로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내 책도 그랬으면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감정이 머물 수 있는 밀도를 유지하는 것.


나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겠지만, 적어도 그 책 안에서는 그 위치가 어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I will likely remain a stranger, navigating the humidity of Seoul with a metronome set to Helsinki. But within that book, I hope the position will not feel awkward. I hope it will feel like the only honest place left to 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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