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정류장, 도착의 거부

강렬함을 절제하는 교토의 아방가르드

Day 70.
치유란 대개 무뎌지는 일, 파열된 상처의 모서리가 흐릿해질 때까지 둥글게 다듬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작업은 다른 온도로 작동한다.

내면의 격렬함을 숨기지 않고, 선과 비례, 표면 안에 고정시킨다. 감정의 넘침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함을 보존한다.

교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은 위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압축을 제안한다.

그림 속에서 나의 문법을 읽었다. 나는 내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오랫동안 개인적인 생존 기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교세라 미술관에서 나는 그것이 이미 하나의 미학적 형식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충격이었다. 내부의 문법이 이미 외부에 존재한다는 인식. 눈물은 그 확인에서 비롯되었다


진료실, 그림, 문장 모두 이제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불안정성은 부정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경계는 분명히 할 수 있다.


한때 갈망했던 보호자의 형체가 이제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통제된 공간은 규율을 통해 구축된다.

문법(Syntax)은 모서리를 제공한다.

단락(Paragraphing)은 경계를 만든다.

어조(Tone)는 그 반경을 제한한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감추어지지도, 무분별하게 내보여지지도 않는다. 정확히 그 자리에 배치된다.


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매개만 바뀐다.

좌표만 남는다.


교토 산조 역에서 나는 완전히 반대 방향의 열차를 탔다.

종점인 요도까지 간 후 플랫폼을 가로질러 다시 거꾸로 돌아왔다. 차창 밖으로 도시는 점점 희미해지고, 지방 역사 주변에 모이는 그 특유의 텁텁함이 서려 있었다. 전원적이지도, 향수를 자아내지도 않는 풍경이었다.


스쳐가는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간 어떤 건물—희미하고, 약간은 낡은—마치 1990년대 미국 영화 속 동틀 녘 선술집처럼, 밤이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곳이었다.


낮은 붉은빛에 잠긴 이자카야. 고작 서너 명의 사람이 각자의 침묵에 고개 숙이고 앉아 있을 법한 곳이다.


순간 어떤 잔상이 내 안을 스쳤다. 이 객차의 비닐 벤치에 내 옆에 앉아 있을 신체(body)가 아니라, 좁은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성에가 녹아 흐르는 맥주 두 잔을 마주하고 싶은 존재(presence)로.


스쳐 지나간다. 스쳐 지나간다.


또 다른 역이 도착을 알린다. 그리고 사라진다.


문이 열린다. 문이 닫힌다.


주파수는 맞는데, 시간이 틀렸다.


올바른 출발은 도착하기를 거부하는 무언가로 지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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