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던 어느 겨울 아침. 푼돈 아끼자고 또 세금 안내는 동네 채소가게를 찾았다. 천원의 행복처럼, 그 언저리의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푸른 채소를 이 겨울에 만날 수 있음에 나는 또 탐욕스러운 선택들을 한다. 어깨의 장바구니는 이미 가득 찼으며, 양손에는 장바구니에 채 담지 못한 키위며 상추 등 짓이겨지지 않을 부드러운 채소들의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귤 한 박스도 아슬아슬 팔뚝에 얹어서.
주차해둔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은 너무나 시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는 바람이 더 칼날같았다. 춥고 무겁고 불편한 상태로 비탈길을 올라가려니 고개는 저절로 숙여져 내 발걸음을 좇고 있었다. 내 앞에 초라한 운동화 신은 발 하나를 마주쳤다. 80세 정도 되셨을까.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 한 분이 칼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고깃집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셨다. 주로 저녁 시간에 술마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나도 언젠가 가보았던 고깃집의 홍보 전단지를, 그 아침에 말이다. 발치를 내려다보며 걸었기 때문이겠지. 그 할아버지와 나의 정면대결의 장면은.
우리 아부지가 노인이 되어가면서부터 나는 길가다 마주치는 어떤 노인도 다 그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는 희한한 습관이 생겼다. 칼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오전, 그 전단지가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것 같은 이른 시간, 그다지 따뜻한 외투도 장갑도 신발도 아닌 내 아부지 나이 무렵의 할아버지. 내 발치에서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본 시간은 아마도 1-2초였을까. 그 찰나에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그 동네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전단지가 공해처럼 느껴졌으며, 그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의 고단함을 외면하고 싶어서 멀리서부터 그들에게서 떨어져 걸어다녔던 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주친 그 할아버지의 눈을 보고 말았다. 백내장이라도 왔을까. 희미한 눈동자에 세월에 쪼그라든 작은 눈으로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눈. 그리고 손은 나를 향해 한 장의 전단지를 준비해 둔 상태였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스캔하는 그 찰나에 할아버지도 사람좋은 미소를 띤 채로 나의 상태를 보셨겠지. 할아버지의 눈은 웃고 있었으나 손은 주춤하였고, 나는 꼭 할아버지 손에 있는 전단지를 받고 싶었으나 욕심껏 고른 채소들의 무게로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2초의 짧은 순간 마주치며 할아버지와 나는 무언가 생각하고 느끼고 멈추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할아버지를 스쳐 두세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 귤상자 위에 전단지 한 장 받을걸. 전단지를 다 나눠주어야 일당을 받으실테지. 이 추위와 짐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나의 차까지 걸어가면서 할아버지가 전단지 나눠주는 일을 이 겨울에도 이어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자식들 때문일까, 아님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 그 여파로 노년이 힘겨운 걸까. 아, 나는 정말 이상한 여자다 하는 생각으로 결론을 맺을 때까지 나는 그 할아버지의 삶을 상상하였다.
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연민이란 감정의 밑바닥에는 조금은 비겁한 감정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러한 고통이나 결핍을 겪지 않았다는 안도감 또 내가 불행한 타인을 도울 수도 있다는 일종의 우월감. 나는 추운 겨울에 거리에 나와야했던 할아버지와 따뜻한 방에 계신 우리 아부지를 비교했던가. 그리고 내가 그 전단지 한 장을 받아드림으로 하여 그 할아버지의 짐 한 조각을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얄팍한 감정을 느꼈던걸까.
초록불이 들어왔는데 미적거리며 출발하지 않는 앞차에 대한 이해심은 조금도 없다. 자기 속도로 천천히 가다가 교차로에서 나만 멈추어서게 만드는 앞차 운전자에게도. 도서관에서 조금이라도 부스럭거리거나 속닥거리면 눈빛레이저를 즉시 쏘아붙이는 나다. 아파트 화단에 화분 속 흙을 버렸다고 화를 내던 1층 아줌마에게 복수하려고 나는 이 겨울에도 아파트 현관문을 굳이 닫으려 하지 않았다.
너무 추웠던 아침이라 그랬을까. 왜 지금까지도 그 할아버지의 불투명한 회색 눈동자와 선한 미소, 그리고 주춤거리던 손이 아직도 생각나는 것일까. 선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감정에 사로잡히는 내가 너무나 피곤하고 피곤하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내 마음이 상대를 다치게 할까봐 두려운 요즈음이다. 브런치의 한 작가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에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다 니가 그 분을 얼마나 안다고, 니가 정말로 걱정을 하는거냐 또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브런치를 볼 때 마다, 내가 글을 쓸 때 마다,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마다, 무언가 중요하게 해야할 것을 외면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또 나의 어설픈 말이 오히려 더 아픈 말이 될까봐.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공허하다.
나는 나의 말이 연민이 되어 누군가에게 아픔으로 맺힐까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조심스럽게 이 글을 써 본다.
그리고 짧은 브런치 생활 중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던 고마운 분의 안녕을 조심스럽게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