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학성 애착
그는 처음부터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H가 ‘조금 더 조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피곤할 땐 연락을 줄여달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을 자주 했고,
H는 그 ‘나중’을 만들기 위해 조심스러워졌다.
H는 서서히 변했다.
말끝을 조심하고,
화장도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꾸고,
식당도, 말투도, 일정도
그의 패턴에 맞춰 흘러갔다.
그는
“넌 배려심이 있어서 좋아.”
라고 말했고,
H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조금씩 자기 감정을 덜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라졌다.
예고도 없이.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나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는데,
그날 저녁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계정이 닫혔고,
공동 캘린더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H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는 분명 피곤할 것이다.
그는 생각이 많을 것이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사라짐조차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그가 돌아오지 않자—
H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그의 기호에 맞춰 만들어진 존재’였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이
버림받자마자 완전히 무의미해졌다는 것도.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버려진 걸까?”
“아니면
버려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사람처럼 보여버린 걸까?”
#정신의학적 노트:
H는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서서히 줄여온 사람이다.
폭력은 없었지만, 상대의 기호에 맞춰 자신을 설계한 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버려졌다.
피학성 애착은 때로
“맞춰주는 사람”이라는 말로 정당화된 자기소거로 나타난다.
그는 떠났지만, H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H에게 해주고 싶은 말
H야,
그는 너를 지운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자신을 지워나간 걸
그저 조용히 받아들인 것뿐이야.
너는 그가 집착한 대상은 되었지만,
진짜 너라는 사람은
저 멀리 사라져 있었다.
지금부터는
다시 네 목소리를 찾는 연습을 하자.
그 어떤 관계보다
네 감정을 표현할 권리부터 다시 찾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