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H는 그가 떠난 줄 몰랐다.
단지,
그가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H에겐 하나의 암시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정말 끝일지도 몰라.”
“내가 뭘 또 망쳤지?”
“아니야, 너무 예민한 거야.”
그녀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분석했고,
마침표의 개수에 의미를 부여했고,
‘읽음’ 표시가 사라지는 타이밍을 기억했다.
하루는
메시지를 열 번 넘게 쓰고 지웠다.
“잘 지내?”
“혹시 내가 뭘 잘못했을까?”
“너무 말이 없어서 걱정돼.”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노트 앱에 혼잣말을 적어두었다.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반응을 중단했고,
그녀는 그 침묵 안에서
수십 개의 반성문을 스스로 써 내려갔다.
‘어쩌면 내가 너무 요구했나’
‘그날 그 말이 기분 나빴을까?’
‘좀 덜 매달렸어야 했나?’
그날 밤,
H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심장은 너무 빨리 뛰었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휴대폰 화면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처벌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 시절, 그녀는 이런 문장을 남겼다.
“그가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남겨진다는 감각만 남았다.”
정신의학적 노트
H는 유기불안(Abandonment anxiety)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 상태는 보통 애착 대상이 반응을 멈추었을 때 활성화된다.
침묵은 처벌처럼 느껴지고,
침묵을 풀기 위한 지독한 자기비난과 반성이 반복된다.
관계가 끝난 게 아님에도,
떠남의 공포는 실제보다 더 강렬하게 작동한다.
이 불안은
과거의 진짜 ‘버림받은 경험’을 현재에 반복하게 만들며,
상대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버림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더 크게 만든다.
H에게 해주고 싶은 말
H야,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그는 말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고,
너는 그 빈칸을 해석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가 조용해도,
네 안에 말은 살아있어.
그가 떠나도,
너는 남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머물 필요는 없어.
너는
남겨졌던 게 아니라,
스스로 오래 머문 거야.
이제,
나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