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을지라도
이야기는 성년이 되면 '시초지'로 순례를 떠나는 관습을 가진 마을의 데이지라는 소녀의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초지에 두고 온 것 때문에 슬퍼하는 돌아온 순례자를 보고 '시초지'에 대한 의문을 품은 데이지는 금서 구역에서 자신이 사는 세상의 설립자들인 릴리와 올리브의 기록을 찾게 된다. 올리브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1년 전의 일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천재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는 완벽한 인간배아를 디자인해서 결함도 없고 병도 걸리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어내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릴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개조를 하지 않은 비개조인간과 신인류 간의 격차가 생기면서 디스토피아가 도래하고 만다. 릴리는 그런 결과에 혼란을 겪는 동시에 어떤 결심을 한 듯 그녀 자신의 아이를 만들기로 한다. 일류 바이오 해커인 릴리는 자신의 클론 배아에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얼룩이 있는 결함을 눈치채지만 폐기하지 않는다. 대신 지구 밖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결함이 있는 아이들로만 그 세계를 구성한다.
이야기의 전말을 알게 된 데이지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갈등과 고통, 불행은 상상의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곳,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를 유토피아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세계가 유토피아라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또 왜 릴리는 결함이 있는 배아를 폐기하지 못했으며, 올리브는 왜 다시 지구로 돌아갔을까? 그리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그 남자는 왜 울었을까? 고통도 불행도 없는 그 세계에서 왜 그들은 성년이 되면 순례를 떠나야 하는 것인지, 고통과 차별, 혼란과 불행이 만연한 지옥 같은 세계를 마주하고도 그 세계에 남는지. 그런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는 행복과 불행과 같은 속성에 본질을 물음 하는 것 같다.
데이지의 세계에는 고통과 불행이 없지만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제시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알게 되는 일, 또 그 사람과 함께 그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설 것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는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지구로 떠났던 순례자들에게는 1년간 지구에 머물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들이 맞서고 있는 세계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순례자들은 아름다운 세계를 마다하고 차별과 불행, 고통이 만연한 지구에 남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정상적인 범주를 멋대로 규정하고 그 범주에서 벗어난 것을 무례하게 배제한다.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일은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각자 모난 점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텐데도 그런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시린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에는 세상이 얼어붙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한다. 그런 모순이 놓은 두 가지의 길이 평행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많은 차원이 겹쳐진 세계라서 어쩌면 그 선이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또 다른 면으로는 세상살이가 참 그렇다. 사는 게 심플하고 간단하고 잘 풀리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흘러가지 않는다. 주위를 보면 일단 내가 가장 불행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항상 좀 고생하는 편이고, 남들은 나보다는 쉽게 사는 거 같다. 그런 인생이지만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도 아주 충실히. 나는 데이지의 마지막 질문이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고 뜻대로 흘러가는 법도 없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불행하기 위해서 혹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걸. 가끔 너무 고단한 삶에 그런 것을 잊고 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올리브는 그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성년이 되면 지구로 순례를 가는 관습을 남겼고, 그 자신 또한 지구에 남았다. 데이지 역시 분명 괴로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구로 향한다. 김초엽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 전반에서도 '분리주의와 맞서는 삶'과 결을 함께 하는 인간적인 가치를 제시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행성 간의 이동이 가능해진 시대에 인체 냉동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 안나이다. 워프 항법ㅡ빛의 속도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을 만들어 빛보다 빠르게 다른 은하로 이동하는 항법ㅡ이 상용화된 우주 개척 시대의 서막이 열렸을 때, 인간을 효율적으로 다른 행성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발전된 딥프리징 기술이 필요하게 된다. 안나의 딥프리징 기술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안나의 남편과 아들은 먼저 슬렌포니아로 이주를 떠났다.
그런데 우주 개척 시대의 2차 혁명, 고차원 웜홀 통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워프 항법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성간 항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로 인해 딥프리징 연구 지원금이 줄어들고, 안나의 프로젝트 종료 시기는 연기된다. 워프 항법만 존재했을 때에 비하면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필요한 기술이었기에 연구는 끝맺음 내기는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준비한 연구 발표가 있기 전날, 그녀는 슬렌포니아행 우주선이 내일 마지막 출항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워프 항법으로 한 군데에 보낼 돈으로 웜홀 통로를 이용하면 다섯 군데도 넘게 보낼 수 있는 경제성 때문에 워프 항법을 이용해서 운항하는 우주선을 없앴는데, 슬렌포니아 근처에는 웜홀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도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방적인 연방의 통보에 한 민간단체가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주 정거장'을 만들어 몇 달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먼 우주로 출항했지만 슬렌포니아로 떠나는 우주선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우주 연방은 우리를 외면했네.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거야. 우스운 일이지.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지는 방식만을 사용했던 것이 연방 아닌가.
한편, 이미 100년 전에 폐기된 정거장이 남아있을 자리조차 없는 궤도에서 정거장을 수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직원은 완강하게 안나를 설득한다. 안나는 백 번도 넘게 잠에서 깨었다 깨며 170세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라고 적힌 기약 없는 티켓을 쥐고 있다. 직원이 잠시 방심한 사이, 그녀는 그녀의 구식 셔틀을 타고 떠난다. 슬렌포니아로.
과학의 발견과 발전은 변화를 만들었다. 그 변화가 진정한 진보이며 긍정일까? 이전에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충격으로 다가온 부분은 농업혁명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시선이었다. 농업혁명으로 인류가 진보했을 것이라는 상상과 달리 농경사회 이전의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건강했으며 노동의 부담이 적었고 전염병의 영향도 적었다. 문명과 인류의 진보와 관계없이 개별 유기체의 행복도로만 보자면 아마 하루 종일 밭을 갈고도 굶거나 병에 걸렸던 농업혁명 시대의 농부보다는 사흘에 한번 노동을 하던 수렵채집인이 더 행복할 테다.
이런 시선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발견과 발전은 인류의 '어떤 것'을 진보시키고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상처받고 소외되고 남겨진다. 그리고 그 서사는 인류 문명 이래 계속 반복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주문을 하지 못하고 가게를 나오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 나의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 소외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안나는 남겨지고 소외된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경제성'을 이유로 비효율적인 것들을 소거하며 흔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것들 중에서는 그것만을 세상과의 연결고리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이 이야기는 다시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붙잡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하루아침에 가족과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된 안나에게 있어 슬레포니아는 어떤 의미일까? 한때 내 고향이 될 수 있었을 곳,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 늘 그리워하고 상상해온 그곳.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명확히 아는 안나는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방법으로 떠나고, 나는 그 항해를 열렬하고 간절히 응원하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들을 뛰어넘어 '무엇인가'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그 과정에서 구식이 되어버리는 것들의 가치는 때때로 너무 쉽게 망각되는 것 같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것들을 뛰어넘을 것이라면, 그리고 무엇인가에 도달할 것이라면, 우리가 조금 천천히 변해갔으면 좋겠다. 언젠가 우리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 빛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구식이 되어버린 것들을 한순간에 외면하지 말고 천천히 예의를 갖추어 이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마저도 너무 어려운 일이라면, 남겨지는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면 좋겠다. 세상에 필요한 것들 중에 좀 더 필요한 것이 있고, 그것에 자본이 좀 더 투자된다는 논리는 소수의 인간이 전복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는 것의 연결 고리를 잃은 사람에게 나의 작은 친절이 연결 고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텐데. 혹은 그들이 맞서는 세상을 누군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만해질 텐데.
안나의 항해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 예견하면서도 그녀의 여정을 응원하게 된다. 끝이 죽음일지도 모르지만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아는 사람의 용기는 무의미하지 않다. 어쩌면 또 새로운 웜홀을 발견해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녀가 그리워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를 터무니없는 소망을 빌어본다. 잊히고 소외되어온 모든 것들이 그곳에서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윤은 신체 개조 과정이 18개월이나 소요되는 항공우주국의 터널 통과 프로젝트에 선발되었다. 그녀에게는 핏줄로 이어진 것만큼이나 가까운 이모가 있는데, 그 이모는 동양인 비혼모로 당시 48세의 나이로 인류 최초 터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던 최재경이다. 가윤은 검사 과정에서 우주선 폭발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이모가 폭발된 우주선에 타지도 않았으며, 발사 전날 바다로 뛰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은 어디론가 새어나가 언론에는 연일 '최재경 참사'ㅡ여성으로서 성공한 우주인 비행사이자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로 존경받았던 재경이 사실 비겁한 도망자였다는ㅡ가 보도된다. 사람들은 재경과 가까운 사이이자 현재 우주비행을 준비하는 가윤에게 어마어마한 비용이 투자된 프로젝트를 이기적으로 망가트린 재경의 책임을 묻고, 가윤의 자격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가윤의 신체는 터널을 통과하기에 적합하게 개조되어가고, 가윤과 재경의 딸 서희는 재경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추측해보기도 한다. 어느덧 가윤의 우주선 발사일이 다가왔다. 우주의 저편에 대해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던 재경을 생각하면서 목숨을 걸 만큼은 아니지만 꼭 봐야 했던 저편의 우주를 내려다본다.
과학적 지식과 거리가 먼 내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판타지스러운 부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성이며 동양인인 데다 비혼모인 재경이 전 지구에서 딱 3명을 꼽는 우주비행사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재경이 살던 세상은 우리의 세상보다는 조금 나아서 어찌어찌 우주비행사가 되기는 했는데, 역시나 비틀린 관심이 뒤따랐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그리는 이야기들은 가상의 미래를 거울삼아 우리 세계의 약자ㅡ비혼모, 여성, 장애인, 이주민ㅡ를 비춘다. 그래서 SF 소설임에도 하이퍼리얼리즘처럼 다가오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우리가 딛고 선 세상을 관통한다. 재경의 자격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 '여성-동양인-비혼모' 같은 물어뜯기 좋은 요소를 가진 사람의 성공 서사라니. 불 보듯 뻔한 결말을 예상토록 하는 사건과 사이보그라는 신선한 요소가 간명하고 경쾌하게 만나는 충돌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이다.
우리의 앞선 시대에 많은 선배들(소수자 선배들)이 존재했고 그 덕에 어떤 약점들은 조금이나마 보호된다. 그럼에도 세상의 예리한 눈은 세대가 바뀌어 가는 것에 맞추어 소수자들에게 멋대로 기대를 안고 어떠한 자질들을 요구한다. 재경은 자신의 소수성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간의 기대와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만의 해방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가윤은 지상의 사람들이 부여한 책임을 짊어졌지만, 큰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재경이 그 모든 무게를 가지고 바다로 가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재경 때문에 가윤은 심해로 간 최초의 사이보그가 될 기회를 잃었다. 이제 가윤은 재경의 전적을 뒤쫓는 대신, 터널 너머로 간 최초의 인간이 될 예정이었다.
김초엽의 소설집 자체가 그러하지만 특히나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가 제시하는 메시지가 여성주의와 맞닿아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재경이 가진 소수성이 그 세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재경이 선발된 것에 의문을 가지지고 재경이 사라진 것에 비난하지만 그녀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규정한 정상 혹은 통념의 범주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요소를 나누어 가져 비슷하게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은 연대를 통해서 자신 개인의 희생보다는 여성인권이 상승하기를 바라는 것. 그런 여성주의가 재경과 가윤을 통해 비추어진다. 세상의 차별이나 억압, 배제와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연대감을 가지고 어떤 문제의 무게를 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작은 문제 해결 후에도 지속되는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누군가는 최초의 인내와 용기를 디딜 것이다. 그리고 어쩔 때 그것은 희생으로만 부르기에 뭣한, 업적 혹은 위상이 될지도 모른다.
재경이 오로지 자신의 해방만을 위해 심해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심해에서 가장 편한 상태로 개조되었으니까. 재경을 비난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가윤은 건너편의 우주에 꼭 가야만 했다. 심해로 사라진 재경과 건너편 우주의 가윤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고 다른 곳에 존재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의 대부분을 '인간다움의 가치'를 찾는 것에 할애한다. 사람이 만드는 대부분의 것에는 인간다움이 묻어있어서 내가 찾는 가치를 엿볼 수 있도록 한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세계로 갈 수 없다면]의 경우 우리가 어렴풋이 상상해 볼 법도 하지만 여전히 닿지 않은 미래, 그 속에서 우리가 딛고 선 세상의 인간다움의 가치를 제시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소설집에는 리뷰에서 소개하지 않은 <스펙트럼>, <공생 가설>, <감정의 물성>, <관내 분실> 4편을 포함해 총 7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리뷰하며 우리가 사회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존재들, 그럼에도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 우리가 잃지 않고 잊지 않을 슬렌포니아ㅡ인간다움ㅡ같은 것들을 생각해 봤다. 나머지 이야기들에서는 또 다른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 만큼 이 소설집이 제시하는 인간다움의 가치는 풍부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1주년 리커버 특별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게 되었는데, 책의 맨 앞장에 김초엽 작가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언젠가 별들의 우주에서, 당신만의 슬렌포니아를 찾으시기를 바라며.
안나의 슬렌포니아는 한때 그녀의 즐거운 상상, 그리움의 결정체,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 각자의 슬렌포니아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슬렌포니아에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으니까.
안나가 빛의 속도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식 셔틀을 출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슬렌포니아, 우리가 공동으로 그리는 슬렌포니아에 가는 일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하리만치 느리게 느껴질 때도, 그저 그리움에 잠식되어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야 할 곳을 명확히 기억한다면 백 번의 수면과 깨어남에도 지지 않았던 안나처럼 우리의 비행선도 출항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서로의 비행을 응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