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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PEACE Jun 06. 2022

서른의 반격 / 손원평 (2017)

부당한 세상에서 나로 살기


줄거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태어나 서른이 된 비정규직 인턴 김지혜. 대기업 DM 산하 아카데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언젠가는 DM의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을 말고는 흔한 이름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반지하 집에 살며 복사와 잔심부름을 하는 인턴으로 말이다. 그런 지혜의 인생에 규옥이라는 동갑내기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아카데미 인기 강사 박 교수의 인기 도서의 원고를 써주고 알바비도 받지 못하고 이름 한 줄도 남기지 못한 남자다. 박 교수의 심부름을 갔던 카페에서 그런 폭로를 듣게 된 지혜는 애써 그것을 없던 일로 친다.


 어느 날 신입 인턴으로 다시 나타난 규옥. 그와 지혜는 직원 복지를 명목으로 사실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가는 '공짜 수업' 우쿨렐레 강의를 함께 듣게 되면서 가까워진다. 우쿨렐레 수업이 끝난 뒤 뒤풀이에서 뜻밖의 멤버가 모이게 되는데 지혜와 규옥, 그리고 무명 시나리오 작가 무인과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남은 아저씨다. 그들은 부당함과 모순이 가득한 세상에 작은 반격을 하자는 모종의 계획을 꾸미는데..


 생리현상이 자유분방한 부장에게 익명의 메시지를 보내는 장난과 놀이로 시작된 반란은  남은 아저씨에게 동업 사기를 치고도 승승장구하는 국회의원에게 날계란을 던지는 일까지 이어진다. 한편 지혜는 반란이 계속되는 중에도 자신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학창 시절 학교폭력 가해자를 만나기도 하고, 규옥과의 로맨스에서 혼자만의 실연을 겪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무인 아저씨의 시나리오를 도둑질해서 흥행시킨 대기업 DM을 상대로 다시 반란을 계획하던 중 정작 부당함의 당사자인 무인은 계획에서 빠지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계획을 진행한 세 사람의 반란은 그들의 하찮음과 무인의 배신으로 막을 내린다. 동지의식을 가지고 함께 그래비티를 칠하며 춤을 추던 네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끝을 보게 된다.





01. 의자는 그냥 의자일 뿐이다.


지혜는 자신이 정해둔 스스로의 위치가 명확한 사람이었다. 박 교수의 치부를 공공장소에서 크게 말하는 규옥을 목격했던 그녀는 '내가 정직원만 됐어도' 말했겠지만, '나는 이곳에 주변인이다'라며 그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런 지혜에게 규옥은 교실 앞 쪽에 강사가 앉을 수 있는 의자와 교실에 놓인 학생들이 앉는 의자를 두고 '의자의 마법'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의자의 마법이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권위와 힘을 가진 줄 착각하는 마법이다.


 규옥은 세상을 전부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부당함에 일침을 놓는 가치의 전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지혜와 규옥, 남은과 무인은 부당한 권위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는 일종의 놀이, '반격'을 시작한다. 규옥의 말처럼 세상은 누군가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개인의 발전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뤄지는 것이 없는데, 당연히 세상을 바꾸는 것에는 더 많은 행동과 말이 필요하다.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함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은 한편 '자기 몫'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것들을 누군가 부당하다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사실은 나는 지금 가진 게 없기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은 아닐까 고민해 봤다. 결론은 '내 몫을 위해서만 싸우지 않는 노력'은 내 몫이 생길수록 더욱 치열해야 한다는 거다. 세상에는 내 몫을 위협하는 부당함만큼 더 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최근 아는 지인을 통해 소소한 알바를 제의받았는데 하는 일에 비해 페이가 너무 적었다. 물론 한 두 푼이 아쉬운 나는 홀랑 그 기회를 잡고 싶었지만 그럼 나로 인해 우리의 인건비는 더더욱 후려쳐질 것이 눈에 뻔했다. 이미 우리 업계에서 '후려치기'와 '열정 페이'는 만연한 일이다. 나는 거절했지만 누군가는 분명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과 싸우는 건 이렇게 보잘것없고 때때로 나 혼자 애쓰는 하찮은 일 같다. '어차피 누군가 할 거 내가 할까?' 하는 치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이고, 그럼에도 내 몫을 챙기는 것보다는 정의를 지키는 것이 부당한 세상을 향한 반격 아닐까.


 부당함을 참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규옥은 박 교수의 잘못을 큰 소리로 말해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세상이 변할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게 됐다. 내가 정의를 지키는 것은 고매한 입장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조금 더 좋은 세상에 살기 위함이다. 또 부당한 권위로 내 마음에 잔뜩 짐을 얹은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닌 마음의 짐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이며, 부당함에 한마디도 못한 채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치졸한 수를 쓰는 나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장한다. 의자는 의자일 뿐이다. 어떤 의자에 누가 앉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본질을 보면 된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쪽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믿는 수밖에.


 한편 지혜와 규옥이 일하는 아카데미에는 진상 수준으로 생리현상을 조절하지 못하는 김 부장이 있는데, 규옥은 '반란의 맛보기'로 김 부장에게 "방귀 좀 뀌지 마! 이 가엾은 돼지님아!"라는 익명의 편지를 보낸다. 김 부장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다 결국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인턴 지혜를 추천함으로써 지혜는 정직원이 된다.


 이런 전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김 부장은 비듬, 트림, 방귀,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말로 명령을 하고, 팀장에게 입술색을 바꾸라는 둥의 오지랖을 부리고, 인턴 무료강좌 시스템(월급에서 이미 일부를 수업료로 제하는)을 제안하기도 한.. 정말이지 꼬집고 싶은 구석이 한둘이 아닌 인물이다. 그런 그가 실은 본사에서 눈치와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인턴 지혜를 추천하고 떠나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지혜 역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들과 같은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내가 그들처럼 되지 않았을 보장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타인을 비판하고 미워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인 반면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받을만한 일을 했느냐' 생각을 해보면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전혀 그럴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 거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모여 살고 어떤 이와는 아주 각별한 관계를 이어 붙여나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한 사람이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김 부장의 사정을 듣고 보니 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김 부장의 사표에 일말의 원인을 제공한 규옥의 편지가 잘못되었다고 하기에는 그간의 민폐에 비해 약과인 처사 같으니 규옥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사람 없다. 권위와 부조리함에 대항하는 지혜와 규옥, 남은과 무인에게도 사연은 있다.


 종국에 무인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베낀 대기업 DM의 무대인사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세 사람을 배신하며 DM으로부터 돈을 받고 입을 닫는다. 그리고 가질 것 다 가진 규옥에게 열등감을 표출하며 일갈하고, 그들의 동지의식은 난장판 속에서 끝나버린다. 책을 읽는 중에는 내가 무인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지만, 한편으론 당장 월세 내고 먹고 살 걱정을 하는 현실에 함께하는 '있는 것들의 부조리함에 대항하자'라고 제안한 동지가 사실은 있는 것의 부조리함의 보호 속에 자란 금수저라는 사실이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지 그 심정이 이해 간다. 무인은 무인이었을 뿐이고, 규옥은 규옥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동지의식을 한때나마 공유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의 속내나 진실은 언제나 늦고 또 빨리, 그래서 결국 적절한 때에 알게 되고 지나는 시간과 사람들에 아쉬운 안녕을 고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때로는 부당함이 차고 넘치는 사회와 그것을 말하는 동지들과의 동질감에 질려버리겠지만 삶이 계속되는 한 나는 많은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안녕의 아쉬움으로 조금은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02. 인생의 무지개


지혜, 규옥, 남은, 무인, 유 팀장, 김 부장, 김경윤(김지혜 A), 다빈, 한영철 등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이 튼튼해서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보게 된다. 신기한 건 그들의 사연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만으로 그들을 조금쯤은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가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은 흡입력 있다. 그런 고민이 치열하고 아프기까지 했던 사춘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매일매일 충돌을 겪는 '내 안의 나'들이 때론 질리기까지 한다. 이걸 최소 몇십 년은 더해야 하니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조금씩은 이해하게 되나 보다.


 지혜에게 트리거였던 김공윤의 사연은 조명되지 않지만,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지혜가 뻔뻔한 김공윤을 두고 사람들에게 '친구가 아니니 엮지 말라'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녀의 존재감은 지혜로부터 멀어진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어떤 것은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라는 뻔한 말일 뿐이지만, 내가 너무 소중해지면 어떤 트라우마는 '고작'이 되어버려서 내 인생에서 치우고픈 존재가 되기도 한다.


 정진 씨는 지혜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로 점심시간에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학원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다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정진 씨가 지혜에게 필요했던 이유는 사람에게 '혼자 사유하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말한다. 속된 말로 '관짝에는 혼자 들어간다'고 하던가. 혼자서도 휘청이지 않는 사람이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고 인생의 균형을 지킬 수 있다. 지혜는 규옥에게 로맨스의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규옥의 정체(금수저)를 알게 되자 치사했던 자신의 마음의 부끄러움과 그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그때 다가온 규옥의 마음을 칼같이 뿌리친다.


 어린 날에 내 삶이 휘청일 때 타인에게 기대었고 그런 일은 번번이 더 큰 혼란과 상처만 남긴 채 지나갔다. 나는 덕분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결국 나를 지나친다는 것과 그러므로 남에게 어떤 것을 묻기에만 바쁜 삶에서도 나에게 질문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지혜가 혼란한 삶에서 찾은 안식처 정진 씨가 결국 혼자였던 것처럼 타인이 아닌 나를 안식처로 만들어야 한다. 인생의 답은 스스로 찾는다는 것을 말하듯 지혜 역시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자신의 해답을 '정진 씨'에게서 찾는다.


  자신의 존재와 노력을 인정받을 방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무인과 말 그대로 '덩그러니 남은' 남은 아저씨. 지혜와 규옥은 부당함에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과 편입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한다. 세상의 부당함에 반격을 가하던 네 사람의 모습은 내 안의 조금씩을 빼내어 만든 거 같은 인물이다. 혼자 먹방을 하는 남은 아저씨의 외로움과 무인의 조급함과 열등감, 규옥의 치기와 치사함, 지혜가 겪는 모든 혼란함과 결단, 결국 나는 그들 모두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기름이 물웅덩이에 고여 만들어낸 무지개 띠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게도 펼쳐진다. 청명한 하늘에 뜬 무지개는 보기도 귀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도심 속 물웅덩이에 고인 기름인들 어떠냐, 마음에 기름이 껴 이기심을 채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주 세상에 좌절해 반격할 용기를 잃기도 하는 우리.

때때로 반격하고 가끔은 놀이를 즐기고 춤도 추는 우리.

우리가 스스로 특별한 존재임을 알기까지 각자의 시간과 노력은 다르겠지만, 애초에 우리는 특별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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